[한국여성인물사전] 223. 이화림(李華林)

입력 2017-10-30 11:20수정 2017-10-3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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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훙커우 의거의 동반자

이화림(李華林·1905~1999)은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이춘실. 숭현소학교에서 육아교육을 공부하였고, 1919년 3·1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역사문학연구회의 일원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청진의 유아원에서 근무하면서 1927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성진·안주 등지에서 학생운동을 하였다.

1930년 3월, 26세에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사격, 무술 등을 배우고 윤봉길·이봉창과 함께 김구의 한인애국단 핵심 멤버가 되었다. 일본군 밀사들을 유인,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1932년 1월 이봉창이 일왕 히로히토(裕仁) 암살을 위해 던진 수류탄을 직접 만들고 폭탄 주머니를 이 의사에게 채워주었다. 같은 해 4월 윤봉길 훙커우(虹口)공원(현 루쉰공원) 의거에 함께하였으나 거사 당일 출발 직전 김구가 “두 사람 모두를 잃을 수는 없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광저우(廣州) 중산대학 간호사 과정에 입학,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의 항일투쟁은 식을 줄 몰랐다. 1935년 늦가을 조선민족혁명당 청년당원 모집을 위해 광저우에 온 윤세주의 연설에 감동 받아 가족과 김구를 떠나 난징(南京)으로 갔다.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 의료보건사업의 책임을 맡았으며, 박차정 등과 선전활동을 하던 중 재혼도 하였다. 곧 남편과 결별, 조선 여성의 조직화와 중국 여성들과의 통일전선에 앞장섰다.

1938년 충칭(重慶)을 거쳐, 1939년 3월 구이린(桂林)으로 가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의 부대장으로 무장 항일투쟁에 참가하였다. 김학철, 허정숙 등과 함께 적의 진지 바로 앞에서 ‘염전반전(厭戰反戰)’ 선전에 힘쓰고, 가극 공연, 포로 설득과 의용대 입대 권유 등에 헌신하였다.

1940년에는 뤄양(洛陽)을 거쳐 이듬해 여름 중국공산군과 가까운 타이항(太行)산에 들어갔다. 당시 돌미나리, 도토리 등으로 연명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혁명가 ‘미나리 타령’을 부르며 혁명의지를 불태웠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조직의 활동경비 충당과 생계를 위해 나물장사, 삯바느질, 빨래, 수놓기 등 닥치는 대로 힘든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혁명가들을 굶지 않게 하여 조직을 유지하는 일은 고스란히 여성들의 몫이었다.

1942년 이후 조선혁명청년학교(교장 武亭·무정) 후원 사업을 전개하였고, 조선의용군 부상자 치료에 전념하였다. 1944년 옌안(延安)의 화베이조선독립동맹에서 자료 수집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1월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해방 후 하얼빈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다. 다롄(大連)에서 1999년 95세로 민족의 미래를 그리며, 피나는 항일투쟁의 길을 마감하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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