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집권기 가난한 문인의 아내
진씨(晉氏·생몰년 미상)는 고려 무신 집권기 최고의 문인이었던 이규보(李奎報)의 처이다. 아버지는 대부경(大府卿·종3품)을 지낸 진승(晉昇)이다. 그녀는 1192년에 혼인을 했는데, 당시 이규보는 25세, 그녀는 아마도 20세 전후로 추정된다. 남편의 선대는 경기도 여주의 향리 출신으로, 시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해 호부낭중(5품)을 지냈다.
남편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고,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시절에도 시를 지으면 늘 1등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과거시험에는 번번이 낙방을 하여 예비고사인 국자감시에도 4수 끝에 1189년 22세의 나이로 겨우 합격했다. 이듬해 본고사인 예부시에 합격했는데, 이때도 합격을 취소하고 싶어 할 정도로 성적이 하위권이었다.
그녀의 신혼생활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귀족 자제도 아니고 급제 성적도 나쁘니 관직 임용이 쉬울 리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끊임없이 구직활동을 했다. 1199년 32세의 나이로 남편은 최충헌(崔忠獻)이 초청한 시회(詩會)에서 그를 칭송하는 시를 지어 전주목사 겸 장서기(掌書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구직활동 끝에 1207년 40세로 최충헌에게 불려가 시를 짓고 8품직인 직한림(直翰林)에 임시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정식 직원이 되었다. 남편이 출세가도를 달린 것은 1219년 최충헌이 죽고 최우(崔瑀)가 집권하면서부터이다. 즉 50세가 넘어서야 겨우 변변한 관리가 되었다 할 수 있다.
그간 그녀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에 있는 솥은 다리 셋 중 두 개가 부러져 된장국을 쏟기 일쑤였고, 양식이 떨어지는 것도 다반사였다. 장인이 죽었을 때 이규보는 “살뜰히 돌보아 주셨는데 이제 버리고 가시니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하느냐”며 제문을 써 이들 부부가 처가에 많이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5남 3녀를 낳았으나 그중 아들 둘과 딸 하나가 먼저 죽었다. 가난한 살림에도 부부가 서로를 매우 아꼈음은 아래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아내는 가는데 남편은 남으니 이 무슨 곡절인가/ 그대는 나를 속박하지 않지만 나는 죄수와 같네/ 배는 가고 사람도 멀어지니 마음도 따라가는데/ 바다가 보내는 조수를 따라 눈물도 함께 흐르네/ 단지 강 하나만 떨어져 있지만 물결이 넓고 넓어/ 오히려 천리나 되듯 길은 멀고도 머네/ 곡산이 지척인데 몸은 갈 수 없으니/ 말 위에서 거짓 조는 척하며 머리 돌리는 것을 겁내네.”
이규보는 74세로 죽었는데, 묘지명에 그녀의 사망 사실이 나오지 않아 이후에 별세한 것으로 보인다. 진씨가 산 시대는 무신 집권기와 몽골의 침입 등으로 매우 어수선했다. 또 술 좋아하고, 출세가 늦은 남편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몹시 고생스럽기도 하였다. 그녀의 삶은 무신 집권기 중하급 관료 부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