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 켰지만 2% 부족한 현실..금리인상 한번 못해보고 떠날 가능성 여전
“앞으로 경기회복세가 지속되는 등 경제상황이 보다 뚜렷이 개선될 경우 통화정책 완화정도의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면밀히 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한은 본관에서 열린 창립 제67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통해 한 말이다. 실로 오랜만에 긴축을 시사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반영하듯 채권시장도 오랜만에 이 총재의 언급에 반응하며 약세장을 연출했다.
다만 이같은 발언에도 불구하고 이주열 총재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말까지 실제 금리인상이 단행되긴 쉽지 않다는 판단이다. 이 경우 이 총재는 1990년대말 통화정책이 기준금리로 변경된 후 거쳐 간 다섯 명의 총재 중 유일하게 금리인상을 한 번도 못하고 떠나는 총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인상 깜빡이를 켜고 인하를 해버린 셈이 됐다. 당시 최경환 부총리의 “척하면 척” 발언은 한은 역사상 치욕으로 남을 명언(?)이 돼버렸다. 이 말은 그해 연말 한은 출입기자들이 꼽은 올해의 한은 이슈 중 1위에 오르기도 했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최소한 이같은 깜빡이 논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도 이를 의식한 듯 임기초 언급과 뉘앙스가 비슷하다는 취지의 기자 질문에 “임기 초엔 그랬다. 3년 전 일 아니냐. 당시 4% 성장이 예상될 때다. 그 후엔 세월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여러 사건이 터지면서 성장세가 (꺾였다). 3년전 얘길 왜 꺼내나. (당시에 인상을 시사했지만 못했던 것을 감안해서) 이번에도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깔고 하는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사실상 결연한 의지(?)까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은은 이 총재의 이번 언급을 미 연준(Fed)의 6월 금리인상과 급증한 가계부채 상황이 여전한 가운데 최근 상승폭이 가팔라지고 있는 부동산가격 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도 숨기지 않았다. 실제 이번주 연준이 금리인상을 단행할 경우 한국(1.25%)과 미국(1.00~1.25%)간 기준금리차는 사라지게 된다. 아울러 최근 새 정부 출범 후 서울 강남과 부산 등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과열양상을 띠면서 정부가 이번주부터 대대적인 부동산 투기 합동 단속에 나선다.
최근 랠리를 펼치고 있는 주식과 채권시장에 대해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는 관측도 가능하다. 실제 9일 현재 코스피는 2381.68 포인트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 랠리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국고채 3년물 금리도 지난 7일 1.621%까지 떨어지며 1월5일 1.607% 이후 5개월만 최저치를 경신했다. 그렇잖아도 금융시장의 과열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인 금융상황지수가 과열의 기준점인 1에 바싹 다가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원유재고량 급증에 국제유가가 50달러를 밑돌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두바이유 기준 올 들어 전날까지 국제유가 평균은 배럴당 51.77달러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이는 한은이 전망한 원유도입단가 53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일자리 마련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도 금리인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당장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일자리 추경이 잠재성장률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한은 역시 오랜만에 불기 시작한 경기회복모멘텀에 대한 불씨를 살리기 위해 구조개혁 등을 강조하고 나서고 있는 중이다. 한은은 낮은 금리 수준이 이같은 구조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온 바 있다.
이밖에도 연 8회로 축소된 한국은행 기준금리 결정 금융통화위원회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연말과 연초, 설과 추석 명절이 속한 달에 금리변경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연초인 내년 1월과 설이 속한 내년 2월은 사실상 금리변경이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올해 남은 네 번(7월, 8월, 10월, 11월)의 금통위 중 10월과 11월이 이 총재 임기 중 유일하게 금리를 인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그때까지 앞선 고민들이 해소될 수 있을까? 미국의 금리인상과 자산축소 속도가 빨라지고 부동산 가격 급등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갈 길은 멀고 해는 저무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