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24.강수(强首)의 처

입력 2017-06-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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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출신에도 청빈의 삶 산 대문장가의 아내

강수(强首)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대에 활동했던 유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신라가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한 사람이 강수였다. 문무왕이 “나의 선왕께서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였던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고 하나, 또한 문장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강수의 아내는 부곡(部曲) 출신의 대장장이 딸이었다. 부곡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군현 백성들과 신분적인 차이가 있었다. 강수의 부모가 탐탁지 않게 여겨 강수가 20세가 되자 읍내의 처녀들 중에서 골라 그의 아내를 삼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수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미천한 사람을 배우자로 삼는다면 수치스럽지 않겠냐며 화를 내는 아버지에게 강수는, 가난하고 미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강수는 유학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여 문장가로 유명해졌다. 태종 무열왕 1년에 당나라에서 사신이 가져온 국서에 알기 어려운 대목이 있었는데 강수가 해석하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후 외교문서는 강수가 전담하게 되었다. 강수는 당시 당나라에 갇혀 있던 김인문(金仁問)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한 글도 지었는데 당나라 고종이 감동하여 김인문을 풀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데 강수의 집은 항상 가난하였다. 강수의 성품이 청렴하고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 무열왕이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租) 1백 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문무왕은 신라 17관등 중 8관등인 사찬(沙飡) 벼슬을 주고 해마다 조 2백 석씩으로 녹봉을 늘려 주었다. 강수는 신문왕(神文王) 대 세상을 떠났는데 장사 지내는 비용은 모두 관에서 제공하였다고 한다. 옷가지와 물품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집안사람들이 사사로이 하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맡겼다. 그리고 강수가 세상을 떠난 후 강수의 아내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식을 듣고 대신이 왕에게 청하여 조 1백 석을 하사하도록 하자, 강수의 아내는 “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으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미 홀로 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후한 하사를 받아 욕되게 하겠습니까?”라며 거절하였다. 그러고는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수의 아내는 비록 부곡 출신 대장장이의 딸로 신분은 낮았지만 자신의 뜻을 잃지 않은 기개 있는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편과 뜻을 같이하여 평생 청빈의 삶을 살면서 가난하되 구차하지 않았으며, 신분이 낮았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천한 신분의 여성이었지만 강수의 아내야말로 자신을 잃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살았던 지조 있는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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