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공간] 감자꽃과 유월

입력 2017-05-3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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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내가 아는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는데 사람들은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유월에는 보라색 칡꽃이 손톱만 하게 피고 은어들도 강물에 집을 짓는다. 허공은 하늘로 가득해서 더 올라가 구름은 치자꽃보다 희다. 물소리가 종일 심심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산을 내려오고 세상이 새 둥지인 양 오목하고 조용하니까 나는 또 빈집처럼 살고 싶어서……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에서

감자꽃이 피었다. 흰색, 자주색 꽃이 저희끼리 어울려 피었다. 이런 정경을 시인 권태응은 이렇게 노래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식량이 되는 작물에서 피는 꽃은 대부분 소박하다. 꽃을 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자꽃도 짙은 녹색 이파리들에 가려져 있는 듯 없는 듯 피지만 땅 속 감자 알까지 떠오르게 하는 선명하고 소박한 동시다.

감자는 알이 들고 바람 따라 물결치던 보리도 누렇게 익어간다. 이 시기를 조상들은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겨울을 지나며 양식이 바닥이 나면 봄이 되어 보리가 익을 때까지 먹을 것 걱정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멀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춘궁(春窮)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음은 물론 1970년대까지도 춘궁기라고 불렀던 보릿고개는 넘기 힘든 고개였다.

어떻게 하면 적게 먹고 건강하게 살까를 걱정하는 요즘에는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친구들과 몰래 보리 목을 꺾어다가 그슬려 먹었다. 불김이 스쳐간 통통한 햇보리 알이 씹히던 그 맛과, 옷이랑 입에 검댕이 칠을 해 가지고 돌아가 어머니에게 야단맞던 기억도 아련하다.

곧 유월이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지난겨울이 그랬듯 피는 꽃을 즐길 여유도 없이 숨 가쁘게 달려왔던 봄도 장미를 두고 간다.

올봄은 충분히 정치적이었다. 대체적으로 정치는 통치의 다른 이름이고 그 속성은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이다. 그래서 불의와 거짓의 정치를 하다가 권력을 잃은 사람들은 감옥이나 집으로 돌아가고 또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권력을 잡았다. 그 와중에 편이 갈리고 거짓과 참이 대립했고 정의와 불의가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지난겨울과 봄 사이 큰일을 너무 많이 치렀다. 이제는 우리가 겪었던 그 부끄러움과 환호에 대하여 한껏 성장(盛裝)한 자연의 품 속에서 그것을 돌아볼 여유와 성찰이 필요한 철이다. 그래서 유월이 반갑다. 유월은 부드럽고 조용한 달이다. 그곳에서 편히 쉬라고 달력을 보니까 손 없는 날이 다섯 날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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