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7.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헌신한 박에스터(1877~1910)

입력 2016-12-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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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후 돌아와 하층 여성, 어린이, 장애인에게 인술 실천

박에스터는 1877년 3월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1910년 4월 둘째 언니인 신마리아 집에서 사망하였다. 본명은 김점동으로 선교사 스크랜튼의 일을 돕던 아버지의 권유로 1887년 이화학당에 입학, 졸업 후 세례를 받고 에스터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치료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통역과 병원 일을 하던 그는, 언청이를 수술해 예쁜 얼굴을 찾아준 의사를 보며 의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을 가려면 남편이 필요했던 그는 여의사 홀의 소개로 만난 박여선과 1893년 5월 기독교 방식으로 결혼하였다. 이듬해 12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가 뉴욕 리버티의 공립학교에서 의과대학 진학을 준비하면서 유아병원에서 1년 남짓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였다.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메릴랜드의과대학)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마치고 1900년 6월 졸업하였다. 그런데 졸업을 앞둔 두 달여 전에 농장과 식당 등에서 일하며 박에스터를 정성껏 뒷바라지해 주던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해 1900년 11월 혼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03년까지 서울 보구여관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다 이후 평양 광혜여원(기흘병원)에서 의료 선교사업을 하고 있던 홀부인과 함께 일했다. 1909년까지 당시 전혀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했던 하층 여성들과 어린이들, 장애인을 위해 자신의 의술을 열성을 다해 실천하였다. 황해도, 평안남북도 등을 분주히 오가면서 선교 치료사업에 열중하여 10개월 동안 3000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였다. 전통과 인습에 사로잡혀 있던 하층과 농촌의 여성들을 계몽하고 위생 사상을 전파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데도 진력하였다. 평양에 맹아학교와 간호학교를 설립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도 맡았다. 의료직 여성의 선구자로서 박에스터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한국 의료, 여성, 기독교 활동을 펼쳤다. 결국 그는 폐병으로 34세에 요절했다.

박에스터의 둘째 언니 신마리아는 정신여학교 교사, 넷째 동생인 김배세는 세브란스 부속 간호학교 1회 졸업생으로 간호사, 그의 딸인 신의경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가족이 한국 여성의 귀감이 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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