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7. 장화왕후(莊和王后)

입력 2016-12-0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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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지로 아들을 낳아, 숱한 역경 뚫고 왕을 만들다

장화왕후(생몰년 미상) 오씨는 고려 태조의 두 번째 왕비이자, 고려 제2대 왕 혜종의 어머니이다. 고향은 나주의 목포(현재의 나주시 영산동 소재 영산포)이며, 할아버지는 부돈(富伅), 아버지는 다련군(多憐君)이다.

태조와 장화왕후의 만남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태봉국의 수군 장군으로 목포에 내려온 왕건이 무지개를 좇아갔더니 시냇가에서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함께 자면서 왕건은 그녀의 집안이 한미하여 임신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돗자리 위에 사정을 했는데, 왕후가 재빨리 정액을 몸에 넣어 임신이 되었다. 그녀는 왕건의 첫 아들인 무(武·혜종)를 낳았다. 태조는 무를 후계자로 삼고 싶었으나, 외가가 미약함이 걱정이었다. 이에 태조는 임금이 입는 옷을 궤짝에 넣어 왕후에게 주었고, 왕후가 그것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 그의 후원으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것이 ‘고려사’의 서술인데, 과연 이 설화는 얼마나 사실일까? 우선 왕후의 집안이 그렇게 보잘것없었을까? 나주는 물산이 풍부할 뿐 아니라 서해와 영산강을 통해 중국 및 개성과 연결되고, 동남쪽으로는 신라와도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왕후의 할아버지 이름인 ‘부돈’은 부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집안이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집안이 한미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또 돗자리에 사정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어느 정도는 질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과 그 사이에서 낳은 25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설화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왕후의 적극성이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와 후백제, 태봉으로 나뉘어 있었고, 군소 호족들은 끊임없이 어느 쪽에 붙을지 저울질하던 때였다. 왕후의 집은 후백제 영역에 속해 있었지만, 당시 후백제와 태봉 중 어느 쪽이 패권을 차지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왕건을 만나기 전 그녀는 포구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왕건을 만난 순간 바로 꿈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결국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은 뒤에도 왕태자로 지목되는 것, 이후 왕위를 계승받는 것 모두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고려사’에는 왕후의 행적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없지만, 우리는 행간에서 그녀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장화왕후는 태조에게 나주라는 지역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견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하였다. 또 그녀 집안의 경제력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그녀는 고려의 건국을 연 또 한 명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나주시에는 장화왕후와 태조가 만났다는 샘인 완사천(전라남도 기념물 제93호)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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