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의 역사와 경제] 대한제국 마지막 ‘눈물의 파티’

입력 2016-11-2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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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한국지역인문지원연구소 소장)

1901년 11월 12일 대한제국의 황태자(훗날의 순종)는 아버지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다음 해가 고종이 망육(望六: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인 51세)이며, 보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해니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는 내용이다. 고종은 “백성들에 대한 일이 황급하니 진실로 이처럼 여유로운 일을 할 겨를이 없다”며 점잖게 황태자의 청을 거절한다(이하 인용은 ‘고전종합DB’). 이에 황태자는 다음 날 좀 더 간절하게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고종 역시 거절하면서 다만 정월 초하루에 간단한 제사 정도로 그칠 것을 명한다.

여기서 황태자가 청을 그만두면 불충이고 불효다. 그 다음 날인 14일 황태자는 여러 신하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중화전 뜰에 세워놓고 고종에게 또 한 번 같은 내용의 청을 올린다. 고종이 허락하지 않자 황태자는 재차 백관들이 입시한 가운데 청을 올린다. 고종은 “재정이 바닥이 나서 경비 지출이 어려워 목전의 시급한 것이나 겨우 메워 가면서도 올바른 대책이 없는 실정”이라면서 윤허하지 않는다. 황태자는 15일 다시 신하들을 소집한 다음 다섯 번째로 고종에게 아뢴다. 이번에는 고종도 하는 수가 없는 듯, 내년 가을에 진연(進宴)을 하라고 하면서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한다. 이렇게 하여 1902년 11월 성대하게 치러진 잔치가 바로 ‘성수망육순칭경진연(聖壽望六旬稱慶進宴)’이다.

조선시대의 왕실 잔치인 진연은 왕과 신하 중심의 외진연, 왕비와 대왕대비 등 여성 중심의 내진연으로 이원화해 치르고 밤에는 야진연이 이어지고 마지막에 세자가 베푸는 잔치도 함께한다. 당연히 준비할 게 많았다. 먼저 잔치를 주관하는 특별 관청을 설치한다. 이 관청이 바로 진연청이다. 당시 진연청의 책임자로는 요즘으로 치면 부총리에 해당하는 의정부 참정 김성근(金聲根)이 임명됐다. 부총리가 진두지휘하니 당연히 정부 각 부처나 전국 팔도의 인력과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민관 모두 잔치의 절차는 비슷하다. 우선 날짜와 장소를 확정하고, 초대하는 인원수가 정해지면, 맞춤해 음식을 준비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예악(禮樂)이다. 그 다음 예산을 세워 체계적으로 잔치를 준비하면 된다. 이런 계획이 세워지면 여러 부서가 협조해 잔치 준비를 하는 것이다.

1902년에도 그랬다. 진연청에서 당시 국가 재정을 관리하던 탁지부에 공문을 보내 필요한 돈 30만 원을 마련한다. 다음에는 각종 음식 재료와 요리사, 여령(女伶:국가 행사 때 가무악을 담당했던 기생 신분의 여성)들을 동원해야 한다. 다음 공문을 보면 당시의 준비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번 진연 시에 여령이 각 차비로서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은데 경기(京妓)의 수효가 적어 배치할 수가 없다. 이에 훈령을 보내니 본부의 기녀 중에 옥선, 금희, 금화, 보배, 춘홍, 명옥, 연향, 복실, 금선, 벽도, 금향, 기화, 임소담, 월선, 담연, 조보희를 순교를 정하여 윤선(輪船) 편으로 신속하게 올려 보내어 제때에 연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공문은 진연청에서 평안남도 관찰사에게 7월 11일에 보낸 공문인데, 서울에 있는 기생으로는 행사를 치를 수가 없으니 평양 기생을 차출하겠다는 것으로, 중앙 정부에서 평양 관기의 이름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놀랍다.

7월 20일 평안남도 관찰사는 진연청에 “이제 훈칙을 받들어, 허덕선(許德善), 사종기(史宗記)를 영솔인으로 정해 본부 기녀 16명을 이번 배편으로 함께 올려 보냈습니다”라고 보고한다. 당시의 통신이나 교통 상황으로도 불과 9일 만에 중앙의 지시가 수행됐던 것이다. 기녀뿐만 아니라 요리를 담당할 숙수(熟手)도 지방에서 충원했다. 여주와 수원의 관청 숙소를 동원하는 공문을 보내서 이들은 10월 20일까지 서울에 도착하게 만든다. 음식 재료도 흥미롭다.

▲전체 10폭으로 1902년 고종의 51세 생일잔치를 묘사한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 중 6~10폭.

“이번 내진연 시 사용할 유자(柚子)는 서울 저자에서는 구매하기 어려워서 훈령을 보낸다. 훈령을 받는 즉시 도내의 생산하는 읍에서 8000개를 시가대로 사서 음력 10월 20일 이내에 본청으로 올려 보내되, 이는 막중한 행사에 사용되는 것이므로 잘 익고 흠이 없는 것으로 낱낱이 잘 가려서 단단히 포장하고 서기를 정해 납부하도록 확실하게 알릴 것이며, 값은 본청에서 별도로 지급할 것이니 실제 값을 통보하도록 훈칙해야 할 것이다.” 유자는 서울에서 구하기 어려우니 전라남도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구하되 돈은 진연청에서 시세대로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석류 5500개는 경상남도에서 같은 절차로 구했다.

사람과 음식 재료, 요리사를 모으고, 그 다음에는 행사에 필요한 여러 공연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설무대를 세우고 무용수들에게는 의상을 지급해야 한다. 이것 역시 돈이 든다. 당시 무용수 1명당 의상비는 100냥이 소요됐다. 7월 9일 75인의 의상비로 7500냥이 결제됐는데, 연습 중에 옷이 낡아지고 빛이 바래 9월 24일 다시 의상을 준비하는 관계로 7300냥이 더 소요됐다. 이렇게 부산하게 준비를 해 드디어 11월 4일부터 6일 동안 성대한 잔치가 경운궁 중화전과 관명전에서 펼쳐졌다.

이 잔치의 규모는 현재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때 사용된 그릇 수가 대략 4만8500개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보관할 가건물을 지었는데 그 규모만 174칸이었다. 동원된 요리사는 300여 명. 중화전 진연의 경우 황제에게 바치는 음식은 메인으로 25그릇, 다과로 15그릇을 비롯해 간식까지 총 126그릇이었는데, 한 그릇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각색 메시루떡(粳甑餠) 한 그릇에는 백미 15말, 찹쌀 8말, 껍질 벗긴 팥 8되, 들깨 9말 5되, 생률 8되, 대추 9되, 참기름 3되, 잣 2되, 승검초가루 4되, 꿀 1말 6되, 계핏가루 1냥이 들어갔다. 저육숙편(猪肉熟片) 한 그릇은 돼지 4마리 분량이다. 대전에 오르는 귀빈 1000명에게 15그릇의 상, 대전에 오르지 못하는 초대 손님 700명에게도 13그릇의 상이 주어졌다. 악사나 악공 등의 하위직 공무원들에게도 국수 한 동이, 각색 떡, 각색 강정, 과자, 배와 밤 등의 과일, 돼지고기와 소고기 등으로 한 상이 차려졌다. 경찰과 군인 등 1만4294인에게도 소정의 음식이 지급됐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잔치는 말 그대로 성대하게 벌어졌고, 잔치가 끝난 다음에는 벼슬의 높낮이나 기여도에 따라 각종 포상이 이어졌다. 이를테면 높은 관리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 한 필, 하급 관리에게는 포(삼베)나 목(무명) 한 필, 또는 1계급을 올려주거나 수령 자리를 줬다. 숙수 중 편수(상급 요리사)에게는 목 3필, 일반 숙수에게는 포 2필이 지급됐다.

이 잔치에는 전체 약 31만5000원의 돈이 투입됐다.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에 따르면 1902년 대한제국의 전체 예산은 약 760만 원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규모의 잔치가 1902년 4월에 있었다. 51세를 기념하는 고종의 생일잔치로, 이때 투입된 예산은 약 36만5000원이었다. 1902년에만 두 번의 잔치 예산으로 68만 원이 지출됐고, 이는 국가 1년 예산의 약 9%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시의 대한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정치체제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에서 힘겨루기하고 있었다. 고종 황제는 재정이 바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실추된 황실의 권위 회복을 위해 잔치를 결심했을 것이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예산 낭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황권 강화가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지만 이 잔치는 고종에게는 대한제국의 자주성 확립의 상징성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후 대한제국의 자립과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해 대한제국의 노력에 결정타를 날린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다. 고종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신료들의 자강자립(自强自立)의 꿈은 허무하게 무산되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만다. 2년 후 고종 황제는 강제로 퇴위당한다. 또 3년 후에는 대한제국이라는 국체(國體)는 온 대한제국인의 비탄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결국 대한제국의 국체를 확인했던 1902년 늦가을의 진연은 516년간 지속했던 조선 왕조의 마지막 ‘눈물의 파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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