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채권 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대규모 경기 부양책과 감세, 금융 규제 완화 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쏟아낸 공약들로 인한 이른 바 ‘트럼플레이션(Trumpflation)’ 경계심이 투자자들의 채권 매도를 부채질하고 있다.
1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 8일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9일과 10일 이틀새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1조 달러(약 1170조 원)가 증발했다. 트럼프의 경기 부양책과 이로 인해 예상되는 지출로 경제 성장이 촉진되고 인플레이션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배경에 있다. 이에 미국 뿐 아니라 영국 독일 일본의 국채 수익률도 사상 최저치권에서 벗어나 급등하고 있다. 미국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가격과 반대로 움직임)은 이날 장중 3%를 넘어섰고, 10년물 금리도 2.2%선을 넘어서며 1월 이후 최고점을 찍었다. 10년 만기 길트(영국 국채)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30년물 분트(독일 국채)도 장중 5월 초 이후 처음으로 1% 이상에서 거래됐다. 주요국의 채권 매도가 신흥국 시장까지 강타하면서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금리도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 장기 국채를 팔고, 주식을 사는 작금의 움직임은 지나치다고 전문가들은 경종을 울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러한 움직임은 강력한 경제 성장 덕분에 초저금리 시대와 결별하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투자자들은 감세와 규제 완화 등 트럼프의 경제 정책이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로 실현되길 바라며 베팅하는 한편, 무역과 이민에 대한 강경 조치 등 기타 선거 공약이 경제 성장을 억제할 가능성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채권은 미리 정해진 금리가 수익을 결정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으로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투자자는 손해를 보게 된다. 수익률과 반대로 움직이는 국채 가격이 급락하자 채권 투자자들은 미국 대선 이후 거의 1조 달러의 손실을 봤다. 경제전문방송 CNBC는 “트럼프가 채권 시장을 날려 버렸다”며 “모든 이들의 금리 전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했다.
반면 주식시장에서는 S&P500지수의 금융지수가 지난 9일 4.1%나 뛰었다. 장기 금리 상승과 대출 기회를 넓혀 은행들이 규제 완화에 따른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기대감 덕분이다.
자산운용사 구겐하임파트너스의 스콧 마이너드 글로벌 최고투자책임자는 “경기 확장과 인플레이션 상승을 예측한 거래는 아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며 “그 다음은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는 “이 수준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현재의 금융 긴축 사이클을 마감하고나서 2~3년 후에나 예상되는 수준에 가까운 것”이라며 “금리가 이대로 계속 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국채 수익률은 2010년 봄과 2013년 하반기에도 상승한 적이 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세계 경제 성장 둔화와 고령화에 따른 소비 감소, 부채 증가에 의한 지출 억제가 배경에 있었다.
그러나 WSJ는 주가가 비교적 고평가되어 있고 경제 성장이 침체되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정책 중 하나인 감세는 주식 투자자에게 희소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봤다. 골드만삭스는 미국 법인세율이 현재의 26%에서 20%로 인하되면 S&P500 지수 편입 기업의 2017년 이익 증가 속도는 2배가 될 것으로 추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