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국문과 교수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이른바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는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스펙트럼 혹은 생태적 사유의 차원에 따라 커다란 이견(異見)을 숱하게 파생시킨 바 있다. 가령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전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생태적 리모델링 사업이기 때문에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정부 측 견해가 있었던 반면, 천혜의 환경을 심대하게 파괴하는 지극히 반(反)생태적인 기획일 뿐만 아니라 과잉 투자에 따른 시대착오적 발상이기 때문에 속히 철회되어야 한다는 역공(逆攻)의 견해가 있었다.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4대강 살리기’는, 그 어떤 복지 프로그램보다 선차적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업은 고용을 창출하고 환경을 개선하며 문화 시설의 파생으로 인한 부가가치까지 엄청나게 가져다 줄 계획이었다. 물론 이 사업의 적정성 판단이 공공적 차원에서 최종적으로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이 사업은 지금까지 드러난 부작용들만 살펴봐도 계획 당시의 명분을 상당 부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위적이고 일방적인 추진 과정을 반성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리고 강의 생래적이고 자연 그대로인 모습을 지켜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강’이라는 시적 형상과 시대적 의제(agenda·어젠다)가 만난 장면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자본과 권력이 결합해 강행하는 반(反)생태적 기획을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이 갖는 흐름의 형상
원래 문학작품에서 ‘강(江)’이라는 제재는 역사의 흐름이나 민중의 저항성을 은유하는 데 주로 원용돼왔다. 이를테면 조명희의 ‘낙동강’이나 채만식의 ‘탁류’, 여상현의 ‘영산강’ 등 일제강점기의 ‘강’은 그 자체로 역사의 수난과 민중적 저항을 동시에 표상하는 상징으로 채택돼왔고, 신동엽의 ‘금강’이나 신경림의 ‘남한강’ 등 분단시대의 ‘강’은 민중적 삶의 고단함과 역동성을 동시에 언표하는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강’은 그 자체의 물질적 ‘자연’의 성격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환기하는 추상적 상징 체계로 노래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박두진이 1960년대에 발표한 다음 시편은, 역사의 흐름으로서의 ‘강’의 표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그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비로소 채색되는 유유한 침묵/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갯짓,//아, 홍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무지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가리/얼룽대는 배암 비늘 피발톱 독수리의,//이리떼 비둘기떼 깃쭉지와 울대뼈의/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몸짓.//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강 흐름 핏무늬길 바다로 간다.”―박두진의 ‘강’ 전문
여기서 ‘강’은 역사의 흐름을 은유한다. 이 시편은 바로 그 역사의 흐름이 고통과 분열, 갈등과 증오를 극복해가는 과정임을 증언한다. 모든 부정적인 것이 극복되고 치유될 때 새로운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강렬한 예언자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게 역사적 격동의 과정을 거쳐 이른 ‘그날’은, 비록 강이 옷을 벗고 전신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순진한 모습이 아니라 적나라한 ‘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강은, 짐승들의 잔해로 가득한 모습을 품음으로써, 역사의 미래가 고통과 죽음의 시대를 통과해야 가능한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여기서 ‘꽃/피’의 대립적 이미지는 서로 융합하면서 결속한다. 가령 ‘꽃’은 찬란한 미래의 상징이면서 거기 도달하기까지 치러야 하는 ‘피’의 이미지에 고스란히 겹쳐진다. 그래서 ‘날갯짓/피몸짓’은 강이 치러내는 시련이 되고, 그렇게 시련을 껴안고 강은 ‘핏무늬길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박두진의 작품은 ‘강’의 지속적 흐름을 예언자적이고 묵시록적인 이미지로 표상하고 있다. 이처럼 강이라는 표상은 역사의 흐름이라는 형상을 구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시인들은 ‘강’을 통해 항상적(恒常的) 원리로 존재하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은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누가 물줄기를 자기들 마음대로 바꾼단 말인가? 흐르는 것을 가둔단 말인가? 그 ‘강’은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살리지’(‘살리기 사업’이라고 했으니까!) 않아도, 엄연히, 여전히, 원형 그대로,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 ‘살리기 사업’으로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제라도 ‘그대로’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다음 시편에는, 이러한 사태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삶의 보편적 이치로 끌어올리는 시인의 상상력이 잘 나타나 있다. 표면적 관점만으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파악할 수 없다는 근원 지향의 사유를 보여주는 다음 시편은, 어쩌면 ‘4대강 살리기’ 기획에 대한 가장 발본적 저항과 예견의 속성을 담고 있는 결실이기도 하다.
“강물은 몸에/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모래밭은 몸에/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새들은 지문 위에/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꾹꾹 찍고 돌아오는데/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수만 리 비단인데/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수십억 장 원고지인데/그걸 어쩌겠다고?/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파랗게 질린 강.”― 공광규의 ‘놀란 강’ 전문
강에 피사체로 모습을 찍고 있는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은, 강 스스로 자신의 몸에 ‘탁본(拓本)’한 천연의 결과이다. 또한 강가 모래밭은 물의 겸손을 ‘지문(指紋)’으로 남기고, 새들은 그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落款)을 찍기도 한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등장한 ‘탁본/지문/낙관’은, 자연이 어떤 신성한 힘과 함께 스스로 문양을 만들고 흐름을 이어왔다는 확연한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자연스럽게 사람들도 강물에 가서 발자국 낙관을 찍고, 그 순간 강은 ‘화선지’가 되고 ‘비단’이나 ‘거울’이나 ‘원고지’가 되어 사물의 언어를 담는다. 거기서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과 갈대들도 서로 어울리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자족적이고 심미적인 자연 사물들의 모습을 두고 시인은 의미심장한 전언을 배치한다.
말하자면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파랗게 질린 강”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자연의 자체 완결성이 무너져가는 현상을 암시한 것이다. 파랗게 질려 “그걸 어쩌겠다고?” 반문하는 강물의 표정이 그대로 선연하다. 이렇듯 어떤 외부적 힘에 놀라는 강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시편은 생태적 사유와 현실 연관성을 결속한 뚜렷한 물증이 되고 있다.
왜 평화롭기만 하던 ‘강’이 깜짝 놀랐겠는가? 이 ‘깜놀’ 과정에는 정치권력이 쇠붙이를 동원하여 강을 변형하려 한 폭력성이 개재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강’은, 우리의 생래적 보금자리요 자연의 원리와 법칙이 편재하는 생태적 현장이다. 그것은 그대로 둘수록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사람에게 인권(人權)이라는 것이 있듯이, 자연에게도 자연권(自然權)이 있지 않겠는가? 최근에는 보(洑)에 막혀서 모천 회귀를 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연어 풍경을 우리는 연민 어린 눈으로 보아야만 했다. 그러면 안 된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흘러가야 한다. 이제라도 ‘그대로’ 흐르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