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주관적인 동물이다. 명제라고는 할 수 없으나 심정적으로 보면 나도 부정할 수 없기에 남도 당연히 자신의 안위를 최고로 여길 것이라 추론해본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나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사에 해탈한 이가 아닌 다음에야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찌 타인을 탓하지 않겠는가. 나의 의지와 객관성에 비춰볼 때 남이 바라보는 나에게로의 관심은 상당수 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당연한 이치다. 나와 타인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나의 문제가 더없이 크다는 것 자체가 타인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음을 내포하는 것일진대 나의 문제를 대하는 상대의 태도에 대해 배신감과 허탈감, 섭섭함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사람에게 섭섭함을 느꼈을 때, 나 혼자만 큰 문제에 당면한 듯 외로울 때… 우리는 늘 하던 카톡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도 시선을 두지 않는다. 나 자신이 잔뜩 화가 나 있거나 외롭다고 외치는 모양새다. 하지만 남들은 그런 나에게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끔 “요즘 뭔 일 있냐?”는 안부 전화 한 통에 설움이 북받치지만 그들의 안부 속에는 “나도 그렇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하소연이 섞여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말을 잘 들어주길 원하고 있지만 반면 자기의 현재 문제가 가장 커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람 관계의 숙명적인 아이러니’다. 내가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먼저 베풀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하는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남의 말은 수십 명의 입을 통해 내 두 귀로 들어온다. 귀가 두 개인 이유를 애써 말하지 않더라도 그동안의 나를 되돌아보자. 내가 지금 몹시 외롭고 슬프다면, 그럼에도 누구 하나 상의할 이가 없다면,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이 또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받아들이자. 지나고 보면 내 말을 들어주었던 사람에게 나 또한 마음이 더 가지 않았던가? 인정해야만 변할 수 있고, 그렇게 변해야만 당면한 슬픔과 자기 좌절의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다. 실업의 고통, 미취업의 방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바로 설 수 있으려거든 직시(直視)의 현명함이 필요하고, 스스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미생(未生)임을 인정해야 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하지 못하기에 이제 나 스스로 바로 서야 한다는 건 명제가 됐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오늘 아침, 이 가을의 초입에서 위로받고 싶었던 그들에게 이젠 내가 먼저 전화 한 통 걸어볼 요량이다. 내가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