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사 주어야 할 부서가 불만이다. 칼이 없어 요리를 못 하는 게 아닌데 웬 칼 타령이냐는 거다. 게다가 그놈의 칼로 요리만 하는 게 아니라 수시로 옆 사람 옆구리도 찌르곤 하는데 새 칼을 사주면 그 짓부터 먼저 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누구 이야기냐? 칼을 사 달라는 요리사는 야당이고, 못 사주겠다는 쪽은 대통령과 청와대이다. 그리고 문제의 ‘칼’은 소위 ‘상시 청문회’, 즉 국회 상임위가 ‘소관 현안’에 대해 언제든 쉽게 청문회를 열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결국 국회는 이 ‘칼’을 가지기 위한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대통령은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누가 잘못됐나? 우선 대통령이다. 첫째, 의회주의를 존중했어야 했다. 세상에 없는 권한을 달라는 게 아니다. 내각제 국가는 물론 미국과 같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도 상임위 단위의 현안 관련 청문회는 일상화돼 있다. 못난 요리사라도 모양은 제대로 갖춰 줄 수 있다는 말이다.
행정부와 사법부가 잘하고 있는 상황이면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 국회가 잘하고 있는 행정부와 사법부 옆구리를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대응이나 법조 브로커 문제 등 국민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 수도 없다. 국회더러 새 ‘칼’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둘째, 국회나 정당도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다. 새로운 실험을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알 수 있나? ‘작심 삼 일’이건 ‘작심 한 달’이건 잠시나마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될지. 새 칼을 가진 요리사처럼 말이다.
실제로 청문회가 일상화되면 장관과 재벌을 불러놓고 호통이나 치는 관행 등이 개선될지 모른다. 그런 꼴이 일상화되는 것을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기업 등 특수 이해관계 집단 등의 로비활동도 더욱 투명해질 수 있다. 그런 움직임들이 더 쉽게 포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미운 쪽은 역시 국회이고 야당이다. “의회주의를 존중하라” 외치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폭거”라고 하는 것부터가 가당찮다. 국회에 대한 냉소를 자아내게 하고, 그럼으로써 의회주의를 위기로 몰고 간 쪽이 어느 쪽인가를 먼저 물어보라 하고 싶다.
어디 ‘칼’이 없어 일을 못했나? 입법권, 예산안 심의·의결권, 국정조사권, 그리고 대통령의 인사를 제약할 수 있는 권한에다가 다른 나라 의회는 가지고 있지 않은 국정감사권까지 가지고 있다. 이번에 말썽이 된 청문회만 해도 ‘주요 안건’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열 수 있게 돼 있다. 굳이 ‘소관 현안’이란 말을 넣지 않아도 여야가 ‘주요 안건’이라 합의만 하면 무슨 문제든 청문회를 열 수 있게 돼 있다는 말이다.
‘칼’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예가 되겠지만 소선거구제 아래 국회의원이 시장·군수나 지방의원이 챙길 지역이익이나 챙기는 상황이다. 또 올바른 비전도, 정책 방향도 없는 정당 아래 국회의원 개개인이 특수이익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칼’이 열 개면 뭐하고 백 개면 뭐하나. 오히려 그 ‘칼’로 지역적 이익과 특수이익을 챙기느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훼손시킬 수도 있다.
대통령이고 국회고 이런 일로 싸우지 마라. 구조조정을 하고 신산업을 육성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인력양성체계를 쇄신하고……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그까짓 ‘소관 현안’ 청문회를 열면 어떻고, 못 열면 어떠냐. ‘칼’ 하나로 요리사가 바뀌고 요리가 달라질 일이면 걱정도 하지 않았겠다.
야당은, 또 국회는 싸울 시간이 있으면 스스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고민해라. ‘칼’ 타령을 하기보다는 요리공부나 더 하라는 말이다. 대통령과 청와대 또한 할 일을 해라. 태산을 옮겨도 시원치 않을 상황에 그깟 일로 싸움판이나 열어서야 되겠나. 제발 지금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대통령과 청와대라도 똑바로 봐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