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님을 위한 행진곡

입력 2016-05-1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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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양가 친지들은 조촐하게 식을 준비했다. 신랑 윤상원(1950.8.19~1980.5.27), 신부 박기순(1958.11~1978.12).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에 목숨을 잃은 시민군 대변인과 노동야학 운동가의 ‘아름답지만 슬픈’ 영혼결혼식이다. 결혼식을 찾은 모든 이는 짧지만 빛났던 두 청춘을 그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달 뒤 불꽃처럼 살다 간 두 영혼이 서린 노래가 조용하고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 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소설가 황석영씨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바탕으로 가사를 짓고,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당시 전남대생으로 고 윤상원씨 후배)이 곡을 붙인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이 노래는 이후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시민들의 입을 통해 대학가, 노동현장으로 무섭게 전파됐다. 1987년 민주항쟁 때는 결연한 노랫말과 비장한 곡 흐름이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 모았다. 1980년대 말 대학을 다녔던 필자는 이 노래를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2016년 5월, 신문지면과 방송자막 등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과 ‘님을 위한 행진곡’ 두 개의 제목을 볼 수 있다. ‘임’과 ‘님’. 둘 다 사모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님’은 ‘임’의 옛말이다. 현재 우리말은 두음법칙을 적용해 소중하고 귀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임’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님은? 회장님, 선생님, 과장님 등 명사 뒤에 붙어(접미사) 대상을 높이거나, ‘김영희 님’처럼 사람 이름 뒤에 붙어(의존명사) ‘씨’보다 높임의 의미를 더한다. 의존명사 ‘님’은 앞말과 띄어 써야 한다.

우리말 표기법대로라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맞다. 그런데 어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바로 문학작품이다.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진실의 주인’을 주제로 개최 중인 기획전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이 전시돼 있다. 그렇다면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처럼 제목 그대로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로 시작하는 남진의 노래 제목도 ‘님과 함께’이다. 어디 이뿐인가. 김명애가 장난 같은 인생사를 노래한 ‘도로 남’의 가사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도 듣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다. 표기법보다 ‘시적 허용’이 가슴에 먼저 와 닿기 때문이다.

5·18 민주화운동 36주년을 맞았다. 그날 이후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지만 학살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조차 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진상 규명은커녕 민주화 과정을 함께 겪어 온 ‘님을 위한 행진곡’에 이념 잣대를 들이대고, 심지어 ‘종북 가요’로 몰아세우는 등 치졸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민중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30여 년간 어떤 의미, 어떤 마음을 담아 불렀는지를 모르는 것일까. ‘님’이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민중’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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