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이번 공천과정에서 주요 정당이 한 일을 봐라. 한쪽에서는 ‘친박’, ‘진박’ 운운하며 권력의 호위무사 패거리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다른 한쪽 역시 ‘친노패권 척결’ 운운했지만 실제로는 ‘친문’과 친 김종인의 ‘친김’ 패거리 패권을 강화했다.
이들의 눈에는 국민도, 표도 없었다. 관심은 오로지 패거리 구도 재편에 있었다. 최소한 표는 생각했다고?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대구 민심을 박살내 가며 유승민 의원을 쫓아냈겠나. 또 다른 한쪽 역시 호남 민심을 흔들 국보위 전력을 가진 사람, 그것도 비리에 연루된 이력에 이 당 저 당에서 비례대표만 네 번 한 사람을 당의 얼굴로 불러들였겠나.
다시 국어사전을 열었다. 이번에는 ‘진실하다’를 찾았다. ‘마음에 거짓이 없고 순수하고 바르다.’ 헛웃음이 나온다. 우리 정치에서는 그런 사람을 진실하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정치에서의 진실한 사람은 ‘힘 있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사람’ ‘세금 더 거둬야 복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따위의 진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아서라. 따지고 드는 순간 당신은 이미 진실한 사람이 못 된다. 권력이 그렇다 하고, 여당이 그렇다면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사람이다.
또 하나, ‘정체성’이란 단어를 찾아보자. 여당 공천 관계자 말이 당의 정체성이 공천의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사전적 의미가 꽤 어렵다.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하지만 결국 이 말 아닌가? ‘다른 당과 구별되는 일관된 정책적 정향 또는 특성.’
어째 좀 어색하다. 그 당에 그런 게 있었던가? 성장 어쩌고 하다가 갑자기 경제민주화가 튀어나오고, 복지확대 반대 어쩌고 하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기초노령연금을 주장하지 않았나.
더욱이 여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은 국가의 재정건전성을 누구보다 크게 걱정해 온 사람이다. 행정부 안에 이 문제와 관련된 그의 질문에 대비한 비공식 대응파일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재정건전성을 강조한 유승민 의원을 자르는 데 앞장을 섰다. 정체성을 운운하며 말이다.
‘정체성’을 새로 정의하자. ‘명분 없이 사람을 자를 때 쓰는 말’ 혹은 ‘권력자의 의지를 받들기 위해 만드는 억지 명분.’ 이 정도 되어야 현실과 부합하는 사전이 된다.
야권이 쓰는 단어도 찾아보자. 먼저 ‘정의롭다’이다.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다 하다.’ 이게 사전적 의미이다. 그런데 문재인 전 대표가 청와대에서 밀려난 전직 비서관을 영입한 후, 그의 선거사무실에 가서 “정의로운 정치를 함께 하겠다”고 했다.
아하, 우리 정치에 있어서의 ‘진리’, ‘올바른 도리’ 그리고 그것이 합쳐진 ‘정의’는 이런 것을 말하는구나. 진영 내에서 싸우다 밀리면, 적진에 투항해 그동안 모시던 주군을 향해 닿지도 않을 주먹질을 하는 것 말이다.
또 하나 ‘명예’이다. 그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 그렇다면 야당의 비대위원장이 말한 “명예만 생각하며 살았다”는 말은 어떻게 되나? 옳지 못한 일로 잡혀가는 것은 훌륭한 일이고, 당을 옮겨 다닌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고, 비례대표를 다섯 번이나 하겠다는 것은 품위 그 자체다?
새 정당의 ‘새 정치’라도 조금 나았으면 좋으련만 이 또한 아니다. ‘새(新)’는 ‘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게 있었나. 그나마 가라앉기는 했지만 ‘통합 내지는 연대’ 주장에 ‘도끼’까지, 온통 있던 것투성이였다.
어느 쪽이 이기든 큰일 났다. 진실하게 살라, 정의롭고 명예롭게 살라 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욕이 될 판이다. 그래서 하는 긴급제안이다. 선거용 국어사전을 따로 만들자. 정치를 못 바꿀 판이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도무지 어지러워서 못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