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3월 28일 김옥균(1851.2.23~1894.3.28)- 개혁의 꿈 좌절된 갑신정변의 주역

입력 2016-03-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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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도 ‘민중’도 아닌 ‘민주주의’ 관점의 역사 인식을 제안한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나라를 운영하고 사회와 개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임에도 ‘역사’를 다룰 때만큼은 유독 외면 받아온 까닭이다. 사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김옥균이 대표하는 ‘개화파’와 전봉준이 상징하는 ‘인민’이 함께 빚어온 역사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저서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에서 김옥균이 한국 민주주의에서 갖는 의미를 이렇게 평했다.

김옥균(1851.2.23~1894.3.28)은 충남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에서 가난한 향촌 양반 김병태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물두 살에 문과에 장원급제해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74년 이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등과 교류하면서 개화론자가 됐다.

그는 우정국 준공 축하연이 벌어진 1884년 12월 4일 밤 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했다. 그리고 12월 5일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했다. 이재원이 영의정, 홍영식이 좌의정, 자신은 호조참판을 맡았다. 이른바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청군 1000여 명이 6일 오후 무력 개입해 궁궐을 공격했다. 결국 개화당은 화력이 압도적인 청군에 궁궐을 빼앗기고, 정권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그는 훗날을 기약하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의 동지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일본 정부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갖 박해를 가했다. 결국 그는 1894년 3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재차 망명했다. 하지만 중국도 그의 안식처는 아니었다.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동화양행 객실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사망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팔봉 김기진의 소설에 ‘청년 김옥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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