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이야기-최불암] 되살려야 할 아버지의 자리

입력 2016-03-07 08:19수정 2016-03-0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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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통해 한국의 아버지상을 정립한 국민 아버지, 최불암.
어린 딸을 폭행해 숨지게 한 뒤 장기간 시신을 유기한 목사 부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과 노인 고독사의 증가, 묻지마 범죄와 부정부패 사건 급증…. 최근 상상조차 하기 힘든 끔찍한 가족 파괴 사건과 막장 사회의 징후들을 접하면서 아버지라는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언제든 찾아가도 변함없이 맞아주는 고향의 느티나무 같은 존재이지요. 가족을 홀로 떠받치며 묵묵히 지키고 있는 대들보 같은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최근 아버지의 자리가 흔들리면서 가정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보수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아버지의 자리와 역할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자리가 흔들리면 가족이 불안해하고 반대로 아버지의 자리가 확고하면 아내와 자식들의 자리도 탄탄해지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덟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나를 낳고 바로 중국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작은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가셨습니다. 해방된 뒤 내가 여섯 살 때 돌아와 만났으니 아버지하고 생활한 기간은 채 2년도 안 됩니다. 귀국해 바닷가에 데리고 가 “바다 끝이 보이느냐”고 질문하며 “남자도 마찬가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포부와 희망을 평생 좇아가야 한다”라고 말씀해주신 것부터 초등학교 입학식에 찾아왔던 모습까지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짧지만, 아버지의 DNA가 내 몸에 들어온 시기이지요.

어린 시절 아버지 모습에서 어렴풋하게 아버지의 자리는 어떠해야 하며 가장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아버지의 자리와 역할에 대해 정말 많이 배운 것은 바로 드라마입니다. ‘수사반장’ ‘그대 그리고 나’ 등 내가 출연했던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아버지의 존재 의미나 아버지의 도리를 깨우쳤지요. 자식들과 아내에게 낙제점을 면하는 가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드라마 덕분입니다.

특히 ‘전원일기’는 나에게 아버지에 관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부권(父權)이 상실되던 1980년대 상황에서 노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내를 존중하며 자식을 큰 가슴으로 품어 안는 아버지의 모습은 연기하는 나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어요.

나는 ‘전원일기’에 출연하면서 가정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아랫목에 앉아 연기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제작진은 아랫목 자리가 아내 역을 맡은 김혜자씨와 얘기를 하면 옆모습만 보이는 등 문제가 있다며 제가 맡은 김 회장이 앉는 위치를 바꿨으면 했지만 내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나는 ‘전원일기’의 아버지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바꾸지 않고 20년 넘게 같은 자리(아랫목)를 지켰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가장으로서 가족의 버팀목이 돼 가정을 잘 이끌어야 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상징적으로 표출하고자 한 내 나름의 의지 표현이었습니다. 실제 ‘전원일기’ 세트장의 방 아랫목에 앉는 순간 두 어깨에 노모와 아내, 자식들을 짊어지는 가장의 무게가 느껴지며 김 회장 역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전원일기’에 출연하면서 집에서도 드라마처럼 ‘아버지 자리’로 명명한 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베란다 옆에 마련한 내 자리는 아내도 아이들도 앉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서 힘들 때나 어려울 때 가장으로서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했지요. 또한, 아버지의 자리를 잘 지켜 자식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하지요.

‘전원일기’뿐만 아닙니다. ‘수사반장’을 하면서도, 그리고 ‘그대 그리고 나’라는 드라마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본질과 책임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생활에서 실천하게 됐지요. 드라마는 이처럼 저에게 아버지상을 구축하게 한 교육의 장이었습니다.

시청자 중에도 드라마를 보면서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의미나 가장의 역할을 체득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는 공기(公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드라마에는 아버지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드라마에서 아버지의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대신 선정성과 폭력성, 불륜과 복수, 분노의 기운으로 가득 찬 왜곡된 가족들이 점령한 막장 드라마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원일기'를 통해 전통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잘 드러낸 최불암.

아버지의 진정한 의미나 역할을 배울 수 있는 드라마는 사라지고 수많은 막장 드라마가 시청자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막장 드라마의 범람은 끔찍한 가정 파괴 사건의 빈발과 가족해체의 가속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막장 드라마가 대중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드라마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 아이들이 좋은 드라마를 통해 인간미와 가족애를 느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진정한 의미와 역할에 대해 많이 배웠으면 합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요.

‘아버지의 등에서는/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하청호 시인의 ‘아버지의 등’이라는 시입니다.

시처럼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가를 마음으로 일깨워주는 드라마가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그래서 가족과 사회의 흔들림 없는 버팀목 역할을 하는 아버지, 즉 아버지 자리를 잘 지키는 아버지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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