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호텔 방안은 아직도 어둠이 짙다. 오전 6시쯤 됐을까. 커튼을 걷어 창밖을 살피니 겨울비가 주말 아침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예고된 비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리고 제법 굵직한 빗방울로 바뀌었다. 50주년을 맞은 재팬골프페어 2016((JAPAN GOLF FAIR 2016) 둘째 날 아침 도쿄의 거리 풍경이다.
기자는 다이토구(台東区) 우에노(上野)에 숙소를 잡았다. 행사장인 도쿄 빅사이트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시간은 잡아야할 만큼 먼 거리다. 전날 오랜 친구와 우에노에서 ‘불금’을 함께한 탓이다.
주말 아침 겨울비는 기자의 발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전차 안은 생각만큼 붐비지 않았다. 하지만 JR 야마노테선 신바시(新橋)역에서 좁디좁은 유리카모메 열차로 갈아타는 순간 상황은 달라졌다. 열차 안은 만원이다. 열차가 도쿄국제전시장정문앞(東京国際展示場正門前ㆍ도쿄 빅사이트)역에 멈춰 서자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목적지는 재팬골프페어 2016 행사장인 도쿄 빅사이트였다. 이른 아침에 얄궂은 비까지 내렸지만 행사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쿄 빅사이트가 위치한 오다이바는 고토구(江東区)의 아리아케(有明)와 아오미(青海) 지구, 시나가와구(品川区)의 히가시야시오(東八潮) 지구를 포함하는 도쿄임해부도심(東京臨海副都心)을 일컫는다. 1980년대 버블경제에 휩쓸려 급속히 매립ㆍ개발되면서 도쿄도 내 새로운 도시로 탄생했다. 도쿄 빅사이트는 1996년 4월 개관해 각종 박람회를 유치, 도쿄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를 굳혔다.
재팬골프페어도 도쿄 빅사이트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재팬골프페어는 1968년 6월 18일 히가시일본골프상공회의 주최로 처음 열렸다. 이후 골프산업의 종합화를 목표로 많은 골프관련업계의 동참을 얻어 일본에서 유일한 골프종합 박람회로 성장했고, 지금은 아시아 최대 규모, 세계 두 번째 규모의 골프 박람회가 됐다.
그러나 이번 재팬골프페어는 개막 전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참가 업체가 매년 줄고 있는 데다 골프 박람회에 대한 회의적 반응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재팬골프페어는 2008년 203개사가 참가해 역대 최고 기록을 달성한 이후 매년 출품 업체가 줄고 있다. 올해는 172개사가 참가했지만 지난해 182개사에 비해 10개사나 줄었다. 골프용품 빅 브랜드의 불참으로 인한 박람회 질적 저하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번 재팬골프페어는 첫날부터 참관객 행렬이 이어졌다. 골프 박람회에 대한 관심 저하는 자연스럽게 씻겨 내려갔다. 행사 첫날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2만6376명(관계자 1만1971명ㆍ일반 1만3801명ㆍ언론 446명)이 입장할 만큼 대성황을 이뤘다. 그 열기는 둘째 날도 이어졌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2만명이 넘는 참관객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3일 동안 총 5만5927명이 행사장을 다녀가 지난해 내장객 기록(5만4081명)을 넘어섰다. 비록 참가 업체는 줄었지만 오히려 내실 있는 행사로 치러졌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반적인 평가다.
실제로 참가 업체에 대한 참관객들의 시선 집중도는 높았다. 던롭스포츠, 브리지스톤, 미즈노, 요넥스, 온오프, 캘러웨이골프, 핑골프 등 메이저 골프 브랜드는 올해 최신 제품 클럽과 용품을 전시ㆍ홍보하며 참관객들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다. 또 계약 프로골퍼와의 토크쇼 및 인터뷰가 진행될 때마다 관련 부스는 북새통을 이뤘다.
메이저 브랜드 사이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부스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 하이브리드로 유명세를 탔던 니켄트 골프(대표 박범석)는 아시아 총판으로서 참가, 신제품 몬스터 드라이버와 하이브리드를 소개, 본격적인 일본 시장 공략에 나섰다.
니폰샤프트, 미쓰비시레이온, 그라파이트디자인 등 유명 샤프트 브랜드 틈바구니 속에서 최고가 샤프트를 선보여 주목받은 업체도 있다. 벤처회사인 세븐드리머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커스텀 샤프트를 출시했다. 이 샤프트의 최고가 모델 각격은 120만엔(약 1200만원)이란다.
벌써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기본에 충실한 골프 박람회로서 자리를 지켰다. 물론 지금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박람회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예년만 못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박람회라는 기본 틀에서 벗어지나 않았다. 관련 업체들은 오랜 경기 불황 속에서도 이번 박람회 출품을 결심했다. 그런 과정에서 더 건실한 골프 박람회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3일 동안 5만6000명이라는 수치는 재팬골프페어에 대한 일본인들의 신뢰를 입증한다.
이번 재팬골프페어가 더 뜻 깊은 건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리는 마지막 전시회였다는 점이다. 내년부터는 도쿄 빅사이트가 아닌 요코하마 퍼시픽코(국제평화회의장)에서 열린다. 도쿄 빅사이트는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 준비로 인한 도시 재개발로 철거 예정이다.
일본 골프용품의 한줄 역사를 써내려간 도쿄 빅사이트엔 오랜 불황 속에서도 절대 뽑히지 않은 일본인들의 심지 굵은 자존심이 남아 있다. 도쿄 빅사이트에서의 마지막 재팬골프페어를 함께하기 위해 자리를 지킨 참관객들을 보면서 그것을 느꼈다. 아마도 50년간 재팬골프페어의 자존심을 지켜낸 일본골프용품협회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이미 도떼기시장으로 전락해버린 우리의 골프박람회에 시사하는 바가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