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에세이] 구순 노인의 사모곡

입력 2015-12-1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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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춘 언론인

제 어머니는 구한말 가난한 한학자의 맏이로 태어나, 여동생 셋과 끝으로 남동생 하나인 전형적 빈농(貧農)에서 살았습니다. 네 살 위의 먼저 결혼한 동네 언니가 시동생에게 중신하여, 역시 가난한 선비 집 3남과 결혼하였습니다.

개성 출신의 제 할아버지는 한양에서 대단치도 않은 관직에 계시다 정변(政變)에 휘말려 경남의 섬 남해(南海)로 귀양 비슷하게 피난해, 차남과 3남은 남해 시골 처녀와 결혼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맞은 큰며느리는 민(閔)씨 집안으로, 어머니는 이 도도한 양반 동서 때문에 고달팠던 시집살이를 두고두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시가는 고성(固城)으로 옮겨가 상업을 시작했으나 겨우 의식을 가릴 정도로 가계가 어려워, 2남과 3남은 일본으로 ‘돈벌이’에 나섰습니다. 바로 윗동서는 얼마 후 남편 따라 일본으로 가고 어머니는 ‘지독하게’ 일을 시키는 큰동서 밑에서 괴로운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다행히 시어머님과 막내 시누이가 좋아해 겨우 견뎌냈다고 합니다.

일본 간 남편이 4년이나 소식이 없던 어느 날, 시어머님이 좋은 꿈을 꾸었다며 절에 다녀오셨습니다. 바로 그날, 남편이 귀국해 곧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로 떠났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태어난 것은 이런 사연 때문입니다. 시어머님이 좋은 태몽을 꾸었다고 하실 때,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하고 중얼거렸던 어머니가 저를 이렇게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와 고모로부터 수없이 들었습니다.

한학자의 큰딸이었지만 학교에 못 간 어머니가 일본어는 어떻게 배웠는지 혼자 시장에 갈 정도로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복막염을 크게 앓아 오래 입원하신 적이 있으나 귀국 후엔 비교적 건강하셔서 빈혈 외에 큰 지병은 없었습니다.

제가 일본 소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아버지는 저를 남해 외갓집으로 데려와 그곳 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습니다. 어머니와 어떻게 이야기가 됐는지 아버지 손에 끌려 집 떠나는 아들을 보고도 어머니는 눈물만 흘리며 별 동요는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3년 뒤 부모님이 완전 귀국할 때까지 저는 보리밥에 김치가 주 반찬인 외갓집에서 혼자 2km 되는 산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습니다. 진주중학교에 진학해 다시 떨어져 살게 됐을 때, 방학을 기다리는 마음은 저보다 어머니가 더 간절했습니다. 제 속옷의 땀내를 맡으며 빨래하러 나가는 어머니를 가끔 보았습니다.

그런 아들이 일본군에 징집돼 떠날 때 어머니의 비통한 모습은 저를 오랫동안 괴롭혔습니다. 입대 후 손톱, 머리카락, 입고 온 옷가지 등을 ‘유품’으로 집으로 보낼 때 아버지보다 어머니 생각이 더 났습니다.

광복 후, 남해에 진주한 미군 부대에서 약 8개월간 근무한 뒤, 부산으로 다시 떠나려 하자 어머니는 “소학교 선생이나 면 서기도 좋으니 집에 같이 있어다오”라고 몇 번이고 부탁했습니다. 약 10년 뒤에야 부모님을 서울로 모셨습니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장남으로서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서울로 모셔온 게 큰 ‘불효’가 아니었는지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살아 계실 때 가끔 시골생활을 그리운 듯 이야기하시던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한 해가 가는 세밑이어서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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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생. AP통신 서울지국장 역임. 자유칼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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