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칼럼] 국격과 법치 사이에서

입력 2015-12-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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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전 국무총리

사람에게 인격(人格)이 있다면, 나라에는 국격(國格)이 있다. 국격은 한마디로 나라의 대외적인 품격을 말한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갖추고 있는 정직과 신의, 배려와 관용, 민주적 의사결정 등의 사회적 자산(social capital)이 국격을 이루는 가치다. 이런 가치가 충만한 나라가 품격 있는 국가이고, 그것이 한 나라의 이미지를 만든다.

1896년 독일의 어네스트 윌리엄스(Earnest Williams)는 ‘Made in Germany’ 로고를 상품에 표시하는 등 국가 이미지를 활용한 해외 마케팅으로 큰 효과를 보았다. 그 후 세계 각국은 국가 이미지 제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가 이미지가 세계무대에서 국가 이익을 확보하는 데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나라가 국가 이미지 정책을 체계화하여 부정적 국가 이미지는 약화시키고 긍정적 국가 이미지를 강화하는 ‘국가 브랜드’화 정책을 전략적으로 추구한다. 우리나라도 2002년에 국무총리 소속으로 ‘국가이미지 제고위원회’를 두고 체계적으로 국가 이미지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아예 대통령 직속의 ‘국가브랜드위원회’를 설치하여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사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경제발전의 긍정적 이미지보다는 ‘전쟁?분단국가’, ‘군부독재’, ‘시위’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 5030클럽 가입(인구 5000만 명이면서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거나 근접한 나라) 등으로 국가 이미지가 점차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친절하고 개방적인 국민’, ‘평화롭고 안정된 나라’, ‘민주화한 국가’, ‘경제가 발전한 나라’ 등과 같은 긍정적 이미지가 부정적 이미지보다 많다.

그런데 요즘 이런 국가 이미지에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가 다시 드리우고 있다. 지난달 19일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를 역행시키는 박근혜 대통령. 한국의 경제 위기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 역사를 뜯어고치려는 시도와 그에 대한 반대를 탄압하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위압적인 시도에서 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미국 더 네이션지는 지난 2일 “박 대통령이 독재자였던 부친의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노동자와 시민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썼다. 대통령의 ‘복면 쓴 시위 시민을 IS와 비교한 발언’은 월스트리트저널(WSJ) 서울지국장 알라스테어 게일(Alastair Gale)이 “정말!(Really)”이라고 강조할 정도로 서방 언론에 충격을 주었다. 그 외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을 비롯해 많은 해외 언론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민주주의의 후퇴와 권위주의 시대로의 회귀라며 우려와 비판을 보내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을 위한 엄격한 법질서의 확립을 강조한다. 국민의 합의로 만들어진 법을 지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다만 법의 준수로 국민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기대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적용된다는 법 앞의 평등이 작동해야 가능하다. 법치(法治)에 앞서 덕치(德治)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국민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려 보살피지 않고 오로지 법에 기대면, 국민의 침묵을 강요하고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합법적 폭력으로 작동할 우려가 있다. 우리의 지난 역사는 법만으로는 결코 지속적인 국가 번영과 국민의 행복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언젠가 나는 ‘2020년을 위한 국가 과제’를 묻는 한 언론의 질문에 “인격을 닦듯이 국격을 닦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답한 적이 있다.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조하기보다는 관용과 소통, 공정한 법의 운용 등 민주주의와 세계시민의 보편적 가치가 오히려 국가의 품격을 높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나 경제, 국민 모두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절이다. 이럴수록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에 대한 큰 성찰이 필요하다. 함께 지혜를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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