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아메리카노가 나오셨다고?

입력 2015-10-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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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짙은 감성이 배어 있는 고(故) 이영훈 작사·작곡, 이문세 노래의 ‘광화문 연가’는 추억을 자극한다. 정동에 자리한 경향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기에, 이 노래를 흥얼거릴 때면 20·30대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기사든 사람 관계든 어려움에 직면할 때면 광화문 뒷골목 선술집에서 선배들과 술잔을 부딪치다가도 늦은 밤 덕수궁 길을 걸으며 뱀이 허물을 벗듯 변화를 꾀하곤 했다.

은행잎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가을의 덕수궁 돌담길은 매우 낭만적이다. 돌담길을 따라 서울시립미술관과 정동극장 등 문화시설과, 정동제일교회, 나도향ㆍ주시경 선생이 공부했던 배재학당(현 배재역사박물관), 이화학당(현 이화여고) 등이 진한 역사의 향기를 뿜어내며 운치를 더한다. 그렇기에 낙엽이 흩날리는 덕수궁 돌담길은 느리게 걸어야 한다.

그런데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은 언제, 왜 생긴 것일까? 별의별 이야기 중에서 인근에 있던 서울가정법원(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혼한 부부들이 이 길을 오갔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사랑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임금만을 모시다 죽은 한 많은 궁중 여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을 질투해 헤어지게 한다는 오싹한 속설도 있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인 정동교회 앞 사거리에서 손을 잡고 가던 남녀 학생들이 각자의 학교로 가기 위해 손을 놓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그럴 듯하다. 사실이든 아니든 오늘도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변함없이 돌담길을 걷는다.

오래된 벗과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파리의 몽마르트르보다 더 낭만적이라며 연신 사진을 찍어 달라는 그녀가 몹시 귀여웠다.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걷기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가을이 선사한 설렘은 커피숍 직원의 한 마디에 훅 날아가 버렸다. “주문하신 뜨거운 아메리카노 두 잔 나오셨습니다~” 나오셨다고! 금테라도 두른 커피인가?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가니 직원은 또 한 방을 날린다. “뜨거우시니까 조심하세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잘못된 표현이라고 차마 지적을 할 수 없어 웃는 표정으로 커피를 받았다.

언제부턴가 ‘사물 높임말’이 우리 일상에 넓게 퍼져 있다. ‘그 사이즈는 없으십니다’ ‘빨대와 시럽은 뒤편에 있으십니다’ ‘화장실은 2층에 있으십니다’ 등의 문장은 사물(화장실까지도!)에 존경의 의미를 부여해 잘못됐으며, 우스꽝스럽다. 이 같은 잘못된 언어습관은 ‘과잉 친절’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동사나 형용사에 붙은 선어말어미 ‘∼시∼’는 사람을 높일 때만 써야 한다. 다만 상대방의 신체나 성품, 심리, 행위, 소유물 등 주어가 사물이지만 높일 수 있는 간접존대가 있다. ‘눈이 크시네요’, ‘선택이 탁월하십니다’, ‘걱정이 크십니다’ 등이 대표적 용례다.

많은 이들이 잘못 쓰는 높임말 중에는 ‘압존법(壓尊法)’도 있다. 말을 듣는 사람이 문장의 주어보다 윗사람이라면 높임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우리말 규칙이다. 예를 들어 국장한테 “부장님께서 오셨습니다”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부장이 자신보다 윗사람이더라도 국장에겐 아랫사람이기 때문에 “○○○ 부장 왔습니다”라고 해야 올바르다.

시월의 마지막 밤엔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보자. 가을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정동 야행(貞洞 夜行) 축제’가 29~31일 정동 일대에서 열린다. 특히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전담했던 경운궁 양이재(養怡齋)와 ‘금단의 집’ 성공회 성가수녀원이 처음으로 개방한다니 기대가 크다. ‘광화문 연가’를 흥얼거려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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