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조선 중기의 문인 차천로(車天輅·1556∼1615)는 ‘문수사에서 잠시 쉬다가’[蹔憩文殊寺]에서 이렇게 읊었다. “온 산에 붉은 잎 비단처럼 찬란해라/낙조의 가을빛 그림 속 얼굴일레/잠시 자리 빌려 단잠에 드니/이 몸이 백운 속에 있는 줄 몰랐네”[滿山紅葉錦斒斕 落日秋光畵裏顔 蹔借蒲團成穩睡 不知身在白雲間]
그런데 이 작품은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시 ‘김거사의 시골 집을 찾아’[訪金居士野居]와 비슷하다. “구름 낀 가을 하늘 아득히 넓고 사방 산은 비었는데/지는 잎 소리 없이 땅에 가득 붉구나/시내 다리에 말 세우고 갈 길 묻노라니/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줄 몰랐네”[秋陰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 마지막 행이 서로 흡사하다.
정도전의 시는 소동파(1037~1101)의 ‘서림사 벽에 쓰다’[題西林壁]를 연상시킨다. “가로 보면 고갯마루 옆으로 보면 봉우리/원근고저가 제각기 다르구나/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것은/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지”[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연대순으로 표절인 것일까. 아니다. 단풍이 좋아 차운(次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