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지도자의 품격과 의전(儀典)

입력 2015-09-0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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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욱 자본시장부장

총경비 3조8000억원. 지난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투입된 예산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 중국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데 쓰인 돈 치고는 어마어마하다. 그야말로 ‘돈잔치’다.

이 열병식은 우리나라 TV들도 앞다퉈 생중계할 정도였다. 절도 있는 의장대와 군인들의 행진, 그리고 중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은 대단한 구경거리이긴 하다.

더구나 미국과 일본이 중국의 열병식에 불편한 심정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터라 국내 언론과 국민의 관심이 더 컸을 게다.

특히 이번 열병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어디에 서느냐가 큰 관심사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톈안먼 망루에 오르면서 시진핑 바로 옆에 서서 입장하는 모습을 ‘감격스럽게’ 보도하는 TV가 있을 정도였다. 시진핑 주석 바로 옆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그 옆에 박근혜 대통령이 자리한 것을 놓고도 자랑스러워하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G2’라 불리며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국’을 꿈꾸는 중국의 최고지도자 지근거리에 자리를 잡았다는 자체로 국가의 위신이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런 생각을 삐딱하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의전(儀典)은 그런 요소를 모두 반영하여 자리를 배치하기 마련이다.

의전(Protocol)은 본래 국가 간 공식 의례를 말한다. 국가 원수나 고위급 인사가 방문할 경우 예의를 갖추는 의식이다.

이 같은 의전은 교회나 절에서의 종교의식에서도 볼 수 있고, 추석이나 설 명절에 제례의식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다. 또한 각종 스포츠 경기는 물론이고 공부하는 모임이라고 볼 수 있는 각종 세미나, 심포지엄, 콘퍼런스 등에서도 등장한다.

특히 조선 500년을 거치며 유교적 질서가 오랫동안 지배한 한국 사회는 ‘의전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의전이 넘쳐난다. 행사장 입구 도착에서 행사장 입장, 인사말과 퇴장에 이르기까지 의전에서 시작해서 의전으로 끝나는 행사가 하루에도 수십개가 열린다.

힘깨나 쓴다는 분들은 자리 배치에서 인사말 순서까지 신경을 쓰며 흡족해하거나 불만을 터트리기도 한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석으로 여겨지는 자리에 앉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면 불쾌감을 드러낸다. 심지어 행사 주최측과 관계가 틀어지기도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높으신 분을 잘 모셔야 하는 비서실은 줄초상이 난다.

이게 아직도 권위주의와 서열에 익숙한 대한민국의 21세기 풍경이다.

의전은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의식으로 오랫동안 존재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 속에서 자율과 창의가 싹트기를 바라는 것은 사막에서 풀이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과 비슷할 게다.

이 같은 한국적 풍경 속에서도 허례허식에 가까운 의전을 과감하게 무시하는 리더들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가 담당하고 있는 자본시장에서는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언변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스타일과는 사뭇 다르게 황 회장은 의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행사장에 자신의 자리가 어디에 있든, 인사말 순서가 어떻게 되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각종 세세한 의전을 챙기는 업무를 하는 비서실이 비대해질 이유가 없어진다. 실제로 황영기 회장 취임 이후 비서실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비서실 직원들이 불필요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일도 없어졌음은 불문가지다.

회장이 의전이라는 형식을 파괴하면서 금투협 임원들이나 간부들도 자연스럽게 의전 문화에서 자유로워졌다는 후문이다. 회장 스스로 격식을 파괴한 마당에 그 아래의 임원들이 의전을 따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황 회장의 의전 파괴는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없으니 본래의 업무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지도자의 품격은 형식적인 의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자리에 앉고, 어느 순서로 한마디를 하느냐에서 품격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진짜 품격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전이 아니라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풍겨나오는 향기 같은 것이다.

은은한 향기처럼 품격있는 지도자가 이끄는 조직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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