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다양성은 뮤지컬의 본질! - 이유리 프로듀서

입력 2015-08-2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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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한국뮤지컬산업연구소 소장ㆍ창작뮤지컬 프로듀서)

요즘 뮤지컬 보는 재미가 더욱 좋아졌다. 주류와 비주류로 이분화돼 있던 한국 뮤지컬 시장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 창조는 그 본질 자체가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도전이기에 다양성이 중요한 본질이지만, 한국 뮤지컬은 낯선 시도에 인색하고 경직돼 있었다. 그런데 창작자들이 달라지고 관객이 덩달아 발 빠르게 변하면서 한국 뮤지컬 시장이 조금씩 다양해지고 있다. 최근에 두 대작 뮤지컬 ‘아리랑’과 ‘데스노트’를 보면서 한국 뮤지컬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가늠했다. 안정적인 흥행만이 목표인 열악한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도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감행하는 뚝심 있는 프로듀서와 크리에이터를 만나니 즐거운 변화는 분명하다.

‘데스노트’와 ‘아리랑’은 둘 다 10권이 넘는 방대한 원작을 뮤지컬로 만든 것이다. 자연히 원작의 밀도와 구체성을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무대 언어로 화학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일본 최고의 거장 구리야마 다미야(연출)는 ‘데스노트’ 원작의 긴장되고 디테일한 두뇌 싸움 대신 부조리한 현대사회의 권태와 허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미장센을 선택했다. 미니멀한 무채색의 무대에 걸음걸이부터 대사까지 호흡과 리듬을 달리하는 변별적인 캐릭터들과 연출의 메신저인 듯 시종일관 연출 의도와 작품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군중(앙상블)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줬다.

한국 뮤지컬에서는 낯선 이 광경을 보면서 오래전 브로드웨이에서 충격적으로 보았던 뮤지컬 ‘저지 보이즈’가 떠올랐다. 롱런 흥행을 이어가는 브로드웨이 쇼 뮤지컬의 무대가 철제 이층 구조의 붙박이 원 세트였다. 데스 맥아너프 연출은 그 단순한 무대 구조 속에서 실존했던 한 남성 밴드의 파란망장한 일대기를 오로지 배우의 동선만으로 역동적으로 보여 줬다. 뛰어난 연출력이었다.

대극장이든 소극장이든 한 작품의 무대를 어떤 콘셉트와 의도로 연출하는가는 크리에이터의 몫이다. 보는 사람은 의도가 관객에게 잘 전달되었는가로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 대극장 공연에서 단일하고 단순한 무대, 이미지에 가까운 절제된 안무 동작, 연극적 표현들은 틀렸다는 시선이야말로 앞으로도 끝없이 시도될 새로운 뮤지컬을 막는 보수적이고 낡은 사고이며, 특히 창의적 상상력의 산물인 공연 작품에 들이댈 잣대는 아니다.

브로드웨이는 “‘스프링 어웨이크닝’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일설이 있다. 청소년들의 낙태, 동성애, 자살 등을 다룬 소재도 그렇지만, 신체 노출이 파격적인 무대 위에 관객석을 만들었고 배우들은 품에서 마이크를 꺼내 전혀 새로운 동작으로 전혀 새로운 노래를 욕하며 내뿜는다. 배우들은 불안한 청소년을 상징하듯 허공에 띄워 무대 세트에 앉힌다.

실험적인 극작가 스티븐 세이터는 얼터너티브 록 싱어송 라이터인 던컨 쉬크에게 뮤지컬을 같이 해 보자고 했고, 던컨 쉬크는 뮤지컬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한다면 인간의 삶을 요동치게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에 프랑크 베데킨트의 ‘사춘기’를 떠올린 세이터는 연출가 마이클 마이어를 찾아갔다. 마이클 마이어는 던컨 쉬크에게 뮤지컬 음악을 하지 말고 그냥 네 자신의 음악을 하라고 했다. 그는 19세기 청소년들이 교복을 입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교복 품에서 마이크를 꺼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극중에서 배우들은 19세기 표현주의 연극을 하다 노래를 부를 땐 현대의 청소년으로 미쳐 날뛴다. 무채색의 단순한 무대는 노래를 부르면 세트 곳곳에 숨어 있던 네온으로 밝아진다. 연극 무대가 록 콘서트장으로 변하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 스스로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급진적 실험이라고 했다. 브로드웨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실험은 다음 해 토니상을 8개나 받았다.

만약에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토니상 수상의 세계적 흥행작으로 한국에 입성하지 않고 한국 창작자들에 의해 한국에서 초연됐다면 어땠을까. 뮤지컬이 아니라는 보수적이고 전문적인 기준도 없는 시각에 시달려 급진적인 실험으로만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연출가 고선웅의 연출적 의도와 장치가 명확한 창작뮤지컬 ‘아리랑’ 또한 그런 시각에 시달려 보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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