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대계 스포츠 외교] 1988년 ‘서울’부터 2018 ‘평창’까지…세계 6번째 ‘스포츠 그랜드슬램’

입력 2015-08-2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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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가 국제사회에 첫 등장한 것은 1948년 런던올림픽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올림픽에 처녀 출전한 한국 선수단은 동메달 2개(역도 김성집ㆍ복싱 한수안)를 따냈지만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그러나 한국은 올림픽 첫 출전 이후 40년 만에 스포츠 변방에서 중심국으로 발돋움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했고, 64년 만에 런던에서 다시 열린 2012 런던올림픽에서는 금메달 13개(은8ㆍ동7)로 종합 5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나 한국이 스포츠 외교에 눈을 뜬 것은 최근 일이다. 경기력에서 눈부신 성장을 보인 것과 비교하면 더딘 행보다. 한국 스포츠 외교사의 더딘 행보 속에서도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다.

특히 ‘바덴바덴의 기적’으로 불리는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작전은 승리가 유력했던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개최권을 따내며 한국 스포츠 외교사에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남아 있다. 당시 박종규 전 한국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과 조상호 KOC 위원장, 정주영 유치위원장 등 각계각층에서 합류한 유치위원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었다. 한국은 1981년 ‘바덴바덴의 기적’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이름조차 생소한 가난한 나라 코리아의 첫 번째 도약이었다.

2002년 한·일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유치전도 일본과의 외나무다리 승부였다. 일찌감치 유치전에 뛰어든 일본은 2002년 월드컵 유치를 확신했다. 그러나 1994년 5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FIFA 부회장 선거에서 정몽준(64)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이 당선되면서 2002년 월드컵 유치전 판도는 한·일 양국의 대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결국 뒤늦게 유치전에 합류한 한국은 정몽준 FIFA 부회장을 앞세워 공동 개최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침체됐던 국민 가슴에 희망과 환희를 안겼다.

그러나 한국은 2000년 이후 스포츠 외교에 영량력을 잃어갔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의 IOC위원장 출마 석패(2001년) 후 위원직 사퇴(2005)는 빈약한 한국 스포츠 외교력에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이어 강원 평창은 동계올림픽 유치전(2010ㆍ2014)에서 연거푸 실패(2003ㆍ2007), 한국 스포츠 외교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2011년 7월 남아공 더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평창의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으로 한국의 스포츠 외교는 다시 한 번 도약 기회를 맞게 됐다. 그리고 내년 2월 스위스 취리히의 FIFA 본부에서 열리는 FIFA 차기 회장 선거는 한국 스포츠 외교에 또 다른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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