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소감이 어땠냐고? 글쎄?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잘 지켜보겠다는 것, 그게 다였다. 밥 먹으러 갔다가 물만 한 잔 얻어먹은 기분이다. 미래를 위해 유연함을 보인 것이라 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걸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유연하기 위해서는 뼈대가 단단해야 하는데 막상 그 뼈대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기분이다.
갑자기 저 아래 가라앉아 있던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한일관계의 적은 오히려 우리 안에 있다. 이 적을 이기지 못하면 발전적 한일관계를 만들 수 없다.’ 무슨 말인가? 대통령과 그 정책라인이 행여 이러한 내부의 적에 포획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적이 누구인지, 또 무엇인지 적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하나는 일본의 우리에 대한 접근은 치밀하고 조직적이고 전략적이라는 점이다. 감정적이고 단절적인 우리의 대일 접근과 다르다. 함부로 유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러한 접근에 의해 우리 안에 적이 길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친일 네트워크가 그 적일 수 있고, 일본과의 갈등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조용한 외교론’이나 한·미·일 동맹체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논리 등이 모두 그럴 수 있다.
내부의 적은 생각보다 강하다.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힘이 약해질 때 쉽게 그 속을 파고든다. 역사관이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비전이 약한 정권이나 지도자는 하루 아침거리도 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1996년 일본은 독도를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기점으로 선언했다. 우리와 협상을 해야 하는 사안이기는 하지만, 일단 ‘자기네 땅’인 독도 주변 해역을 독점적으로 개발하고 탐사할 권한을 가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실질적인 경제영토화 작업도 병행됐다. 일례로 명백히 우리 땅인 독도 주변 바다 밑의 산과 분지까지 일본 이름을 붙여 국제수로기구에 등재했다. 소위 해저지명 문제인데, 이 바람에 울릉도 남단의 울릉분지는 ‘쓰시마 분지’로, 독도 옆의 이사부 해산은 ‘순요퇴’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우리는 뭘 하고 있었을까? 이리저리 엉거주춤하던 김영삼 정부는 1997년 우리의 기점을 정했다. 그런데 그게 독도가 아닌 울릉도였다. 믿어지는가? 일본은 독도를, 우리는 울릉도를 기점으로 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프레임 워크는 김대중 정부의 신한일어업협정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나름 설명은 있다.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암석이고, 해양법상 암석은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울릉도로 물러나면 일본도 그들의 오키섬으로 물러날 것 같아서….” 모두 말 같지 않은 말들이다.
2006년에 가서야 우리 정부도 독도를 우리의 기점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국제사회의 시선은 우리의 마음과 다르다. “영토문제건 수역문제건 일본은 죽어도 ‘다케시마’인데, 왜 한국은 독도와 울릉도를 왔다 갔다 하나?”
해저지명 문제도 그렇다. 2006년 우리도 우리 이름의 해저지명을 등재하기 위해 나섰다. 일본 이름으로 된 지명을 우리 이름으로 바꾸는 계획도 세웠다. 깜짝 놀란 일본이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탐사선 두 척을 독도로 보냈다.
독도해역을 향해 오는 탐사선.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지시했다. 당파하라! 즉 들이받아 부숴버려도 좋다는 뜻이었다. 이에 ‘조용한 외교’ 라인이 나섰다. “안 된다. 분쟁이 생기면 우리가 손해다.” 대통령이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배가 들어오고 있다. 당신들이 부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켜서라.” 결국 이 소식을 들은 탐사선은 물러났다.
누구라 하기도, 무엇이라 하기도 힘이 든다. 그러나 우리 안의 적은 분명히 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를 경계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아니, 경계할 수 있는 역사관과 비전을 갖췄으면 한다. 8·15 경축사를 들은 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