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중 한국정치문화원 회장, 전 가천대 객원교수
세상 일 모른다더니 그는 치매를 앓다 팔십 중반에 돌아갔다. 백 세 시대가 눈앞에 왔다지만 아직 백 살을 산 유명인은 없는 듯하다. 위의 문학인 세 명과 불세출의 기업가 한 명의 탄생 백 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내가 여기에 무슨 유감이 있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아련히 가슴을 저미는 한 지식인의 삶이 떠오른다. 그도 윗사람들과 동갑내기다. 탄생 백 년이다. 그를 K라고 하자. K는 향리가 충남 서산이다. 요즘 달라졌다지만 그 벽촌에서 몸을 일으켜 그 무렵 충청권 명문 공주고보를 나왔다. 따져 보면 김종필(JP) 전 총리가 11년 후배다. JP와의 회견 때 K 이야기를 했더니 굉장히(참말 굉장히) 반가워했다.
K는 수재였다. 공주고보 유사 이래 최초로 경성법학전문학교에 합격했다. 일제 당국이 해마다 백 명을 뽑았는데 일본인 60명, 조선인은 따로 40명을 합격시켰다. 북녘 수재들도 몰려왔다. 평양고보·신의주고보·원산고보· 함흥고보·해주고보 1등들이 쇄도했다. 서울(당시 지명은 경성) 강세는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경기고보·경복고보가 공립학교였고 보성·중앙·휘문·양정·배재고보가 전통적 유명 사립학교였다. 서울고·용산고는 일본인 학교였다. 여기에 남녘 지방 명문 고보로, 공주·청주·전주·광주·대구고보(현 경북고)에다 부산고보가 가세했다.
왜 이렇듯 조선인들이 살인적 경쟁에 뛰어들었을까? 이 학교를 나오면 전국의 각급 법원·검찰의 견습 사무관으로 채용됐기 때문이다. 조선인으로 판·검사(고등문관시험 사법과) 시험에 합격하는 이는 1년에 고작 서너 명뿐이었다. 그러하니 그나마 굉장한 출세였다. 필자가 이토록 장황하게 학교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인 수재의 삶의 희망처, 곧 올해로 탄생 백 년을 맞은 이들의 불우한(?) 로망이었던 걸 세상에 알리고자 함이다.
해방 직후 미국 군정처는 당황했다. 남쪽만이라고는 하지만 전국에 조선인 판·검사가 태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가인(街人) 김병로 등의 권유에 따라 경성법전 출신 사무관 전원(40~50명)을 형식적인 특임시험이란 걸 거쳐 판·검사로 임명했다. 이들이 뒷날 검찰총장·대법관 등을 역임했다.
그 시골에도 진주한 공산군 당국은 K에게 ‘자아비판’을 하라고 했다. 지주의 아들에다 높은 학교 출신의 부르주아 타성을 버리기로 약조했다. 말단 교사로 강등된 채 겨우 두어 달 영어를 가르쳤다가 그는 경찰에 투옥됐다. 나중에 판·검사들이 왔다. 그는 판사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형법상 긴급피난이 인정돼 무죄로 나왔다. 그는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대처로 나가 대학 교수가 되었다. 향년 79세. K는 나의 선친 김용태 박사다. 나는 그의 삶을 ‘사람, 사람들’이란 책으로 묶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