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 풍경] 자두나무 아래에서

입력 2015-07-2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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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강릉 시골집 마당에 가면 여러 그루의 자두나무가 있다. 나무 밑동이 종아리 굵기만 한 것에서부터, 자두나무로서는 고목이라 부를 만큼 큰 나무도 있다. 여름이면 몇 그루는 열매가 빨갛게 익고, 몇 그루는 수박처럼 겉은 푸른데 속은 붉게 익는다. 모양도 아이들 주먹만 한 것에서부터 포도 알처럼 작은 것까지 다양하다.

나는 자두나무가 오랜 세월에 가지가 부러지고 줄기가 찢어지며 고목처럼 자란 것은 우리 집 마당가의 나무를 본 것이 유일하다. 그런 나무들은 130년 전 태어나신 할아버지가 젊으실 때 심은 나무들이다. 워낙 옛날에 심은 나무들이라 요즘 시장에 나오는 자두처럼 열매가 크지 않고 자잘하다.

할아버지는 집 주변의 빈터마다 앵두, 매실, 살구, 자두, 복숭아, 포도, 사과, 호도, 밤, 감, 모과, 석류나무를 심었다. 지금 열거한 것은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들의 열매가 익는 순서를 따라 적은 것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많은 나무를 심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난이야 당장 벗을 수 없지만, 그 집 어른이 조금만 부지런하면 아이들이 남의 집 과일 부러움은 하지 않고 산다고, 그래서 다른 꽃나무보다 과실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나무들이 할아버지를 따라 늙어 죽거나 고목이 되어 그 자리에 아버지가 다시 같은 종류의 과실나무를 심었다. 나무들 사이로도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심은 나무들도 절반가량은 기력을 다해 다음 나무에게 자기가 선 땅을 물려주고,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아버지 자리를 물려주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지 35년이 되지만 지금도 할아버지는 나무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모습 역시 아이들에게는 그러할 것이다.

자두는 지금이 한창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여름만 되면 자두를 찾는다. 그런데 시장에 가면 자두는 나도 자두의 원조가 되는 재래종 오얏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과육도 작고 맛도 시어서 시장에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시골집에도 할아버지가 심은 것은 딱 한 그루만 고목이 된 채로 이 집안의 상징처럼 마당가를 지킨다. 이제는 어느 과수원에도 심지 않는 시골집 마당가의 오얏을 나만 오래전에 집 떠난 도회지에서 추억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신 것을 좋아해서 여름만 되면 나는 늘 오얏나무 밑에 가서 살았다. 어떤 때는 점심을 먹으라고 해도 오얏으로 배를 채울 때도 있었다. 형제 중에서도 유독 그렇게 신 과일을 좋아해 지금도 여름이 되어 마당가의 오얏이 주렁주렁 익으면 어머니는 “나는 저 나무만 보면, 밥도 안 먹고 늘 저 밑에 가서 살던 셋째 생각이 난다”고 애를 쓰신다. 그래서 여름휴가 말고도 강릉 시골집으로 오얏 여행을 꼭 한 번 더 다녀온다.

한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고 또 관계를 맺는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길, 아버지 어머니의 손길, 스승의 깊은 은혜를 포함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는가. 이렇게 우리가 함께 추억하고 애틋하게 여길 사람들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거기에 내 성장기 한 시절의 특별한 추억과 함께 그것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무들까지 있다면 그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사람을 추억하는 일만큼이나 나무를 추억하는 일도 아름답다. 그것은 우리가 한 시절을 서로 마주보며 함께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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