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실망스럽다. 이게 그리 중요한 문제인가? 여당 원내대표가 그만두면 나라가 달라지나? 우리가 안고 있는 숱한 문제들이 풀리나? 여당 원내대표가 아니라 대통령이 바뀌어도 변할 게 없는 판이다. 문제가 그만큼 구조적이라는 말이다. ‘그깟’ 원내대표 문제로 이래서 되겠나.
국회법 개정 문제가 제기됐을 때 내심 기대를 했다. 민주주의와 삼권분립 등 거버넌스 문제가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건 우리 사회의 정치 담론 수준이 크게 높아질 수 있었다.
실제로 국민은 삼권분립과 국회와 행정부의 현실적 관계 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론도 그랬고 학자들도 그랬다. 미국의 입법 비토(legislative veto) 위헌 판결 등 꽤 중요한 사안들이 쉬운 언어로 소개되기도 했다. 가뭄에 내리는 단비 같았다.
재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도 꽤 있을 수 있었다. 국회가 법을 제대로 만들 능력은 있는지? 행정부는 얼마나 월권을 하는지? 그 사이에서 사법부의 존재는 뭔지? 국회 전체가 아니라 로비에 취약한 상임위원회가 행정부의 행정입법을 고치라 마라 하는 게 말이 되는지, 또 그 로비구조는 어떻게 짜여 있는지?
결론은 어떻게 나도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 국회의 저급한 입법능력과 행정부의 권한 남용 등 나라가 잘못되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유를 우리 모두 공유할 수 있었다. 시민이 좀 더 시민다운 시민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언제 이런 걸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나? 허구한 날 누가 대통령 될 것인지,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지 따위나 이야기하고 살았다. 또 이 사람 저 사람 도마 위에 올려놓고 씹기나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종의 문화가 됐다.
늘 하는 말이지만 잘못된 공정의 잘못된 공장에서 좋은 제품이 나올 리 없다. 정치인도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이런 구조 속에 어떻게 제대로 된 인물들이 나와서 자랄 수 있겠나.
그런데도 우리는 늘 그중 잘난 인물이 없나 찾았다. 더 본질적인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사람 저 사람 기대를 걸었다가 얼마 가지 않아 실망하고, 그러고는 다시 다른 사람을 입에 올렸다가 또 실망하곤 했다. 저급한 담론과 저급한 정치의 악순환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가 소중했다. 삼권분립과 거버넌스 구조에 관한 담론이 활성화되면서 아예 공장과 공정을 고치자는 생각이 자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다 무너졌다. ‘배신의 정치’ 운운이 그것이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온 세상은 ‘배신자’가 누구냐를 찾는 문제에서부터, 여당 원내대표가 죽느냐 사느냐로 관심이 옮겨졌다. 정치권은 다시 ‘무림’의 세계가 되었고, 언론과 국민은 다시 ‘무협지’를 읽는 자세로 돌아갔다.
정치든 통치든 많이 주고 많이 베푸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이것저것 직접 고치겠다고 덤비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실제로 그럴 힘도 없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가? 국민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스스로 깨치게 하고, 그래서 모두가 이 나라의 진정한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자극적인 정치적 언어 대신 논리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나? 미래적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며 새로운 담론 생성을 자극할 참모도 없었나? 일부에서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에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동안 정황으로 보아 믿기 힘들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청와대의 지적능력과 논리적 설명력, 그리고 담론을 생산하고 주도하는 능력이 지금처럼 떨어진 적이 없었다. 바닥 중의 바닥이다.
민주사회에 있어 시민사회의 담론 수준을 저하시키는 것은 전염병을 방치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다. 국회가 먼저 잘못하고 어쩌고 하지 마라. 국회가 저 모양이니 대통령과 청와대가 더 잘해야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새로운 관점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라. 또 왜 그리 잘못하고 있는지 고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