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貨殖具案(화식구안)]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입력 2015-05-01 10:47수정 2015-05-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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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형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이 유명한 명제는 그레샴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과거 영국의 헨리 8세는 세금을 늘리지 않고 정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은화의 40%를 일반 금속으로 대체해 제조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상인들은 은으로만 된 좋은 실링은 따로 빼서 두고 질 나쁜 실링만을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시장에서 좋은 은화는 사라지고 나쁜 은화만 남아 유통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바로 지극히 정상적인 개인들의 이윤추구의 결과로, 사람들은 보다 가치가 높은 것은 보유하려 하는 반면 거래 상대방에게 지불하는 것은 보다 가치가 낮은 화폐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사건이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인 18~19세기 무렵, 조선시대 경제계를 뒤흔든 ‘전황(錢荒)’이란 사건이 그 발단이다. ‘전황’은 ‘돈가뭄’이란 뜻으로, 날로 확대돼 가는 상품경제를 화폐 발행량이 따라가지 못해 발생한, 소위 현대경제학적 용어로 풀이하자면 ‘디플레이션’ 현상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화폐정책이 정착되지 못하다가, 후기인 숙종(肅宗) 4년 상평통보를 유일한 법화(法貨)로 정하는 화폐 유통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상평통보를 발행하기 위한 충분한 동(銅) 원료가 확보되지 못한 반면, 임진왜란 이후 봉건신분사회 해체에 따른 상공업 부흥 등 경제규모의 확대와 맞물려 오히려 화폐의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익(李瀷) 등의 학자들은 화폐제도를 폐지하고, 과거의 물물교환 경제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익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 중 ‘전해(錢害: 돈의 폐해)’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곡식과 포목은 화폐의 편리함에 미치지 못하니, 화폐 사용이 백성 간에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농기구를 버리고 (상업을 하는) 폐해가 생기니 어찌 검소함의 풍속이 지속될 수 있으리오?…돈을 매일 사용하다 보니,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돈이 있으면 술이나 고깃국을 사먹는 등 써버리게 되니, 사람들이 ‘돈은 요물(妖物)’이라 일컫게 되는 것으로, 돈의 무서운 점은 부지불식간에 돈을 헛되게 쓰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다산(茶山)도 그의 저서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중 ‘문전폐(問錢幣:전폐에 대하여 물음)’란 글에서 화폐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는 등 안팎으로 시끄럽게 되자 조선 정부는 다시 화폐발행 억제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요즘의 경제학적 관점에서 비판하자면 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즉, 구리의 부족으로 화폐 주조량이 저조한 가운데 화폐를 수요하는 상품경제는 확대되는데 정부가 오히려 화폐의 발행 및 유통을 억제하는 이율배반적 정책을 취하자, 소위 조선후기 사회를 뒤흔든 심각한 ‘전황’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문제가 심각해지자 조선왕조는 부족한 화폐량을 늘리기 위해 구리 함유량이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는 신화폐에 100배의 명목 가치를 부여한 소위 ‘당백전(當百錢)’이란 악화(惡貨)를 만들었다.

이는 가뜩이나 ‘전황’으로 인해 어려웠던 조선경제에 결정타를 먹이는 악수로 작용하게 된다. 즉, 그레샴이 지적했듯이 ‘당백전’이란 악화가 발행되자 양화인 상평통보를 가진 자들은 당백전과의 교환을 기피해 상평통보를 시중에 내놓지 않았다. 결국 당백전만이 유통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물가가 폭등하는 파국을 초래한 것이다.

결국 ‘그레샴의 법칙’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돈에 대한 신뢰’, 나아가 그 돈을 발행하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에는 정부가 의도하고자 했던 정책목표, 즉 통화량 증대 또는 재정수입 증가 등의 목표가 오히려 역효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남발되고 있는 정부의 ‘악화’는 과연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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