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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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임진왜란을 함께 겪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이었다. 특히 앞의 평가처럼 빈틈없고 분명했던 류성룡은 어려서부터 알던 이순신을 천거해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했고, 전후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懲은 혼날 징, 毖는 삼갈 비이니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삼가고 대비하자는 뜻에서 쓴 실록이다. 시경 주송(周頌) 소비(小毖)편의 “予其懲 而毖後患”(내가 그 일을 겪은지라 뒤에 올 환란을 삼간다)에서 따온 말이다. 요즘 TV 드라마 ‘징비록’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서애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편찬된 선조수정실록 40년(1607년) 5월 1일 류성룡의 졸기(卒記)는 평이 좋지 않다. “국량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해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이를 기롱하였다.” 앞부분의 문장력 외교력에 대한 호평과 판이해 의아할 정도다.
징비록과 류성룡을 이야기한 것은 4월 첫 번째 금요일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취지로 1968년에 제정된 향토예비군의 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