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R&D에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입력 2015-04-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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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영국 런던 근교에 있는 항구도시 도크랜드는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상교통의 요지였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해상운송의 주류가 대운하 컨테이너 위주로 전환되면서 강바닥이 얕은 도크랜드의 매력은 점차 떨어진다. 시설 노후화, 인구 감소로 쇠락의 길을 걷던 도크랜드에 변화의 바람이 인 계기는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총리의 재개발 구상에 의해서다. 특히 역사적 경관은 보존하면서 개발을 추진한 점이 인상적이다. 도심과 가까운 지역은 옛 정취를 그대로 살린 고급주택으로 바뀌었고, 설탕창고는 리모델링을 거쳐 박물관으로, 선박은 선상카페로 쓰였다. 산업화의 흥망성쇠로 인해 낙후된 도시였지만 기존의 자원을 재활용함으로써 국제적 업무단지 겸 복합레저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퇴물처럼 여겨지던 건물을 재해석하여 활용도를 높인 사례가 있다. 최근 서태지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기도 했던 통의동 보안여관 건물은 시인 서정주, 화가 김중섭 등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으로 2010년부터는 전시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문래동 예술촌도 비근한 사례다. 이곳은 1960년대부터 철공소 골목으로 유명한 지역이었지만 산업의 중심축이 바뀌면서 예전의 명성은 다소 바랬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낮은 임대료에 매력을 느낀 예술인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이제는 예술인들과 철공소의 공존 속에 독특한 개성이 넘쳐나는 공간이 되었다.

이처럼 쓸모가 없어진 물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해 활용도를 높이는 한편, 숨어 있던 가치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가치도 부여하는 것이 비단 건물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기술도 마찬가지다. 이미 개발해 놓았지만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연구실 창고에 숨어 있는 기술일지라도 잠재적 시장가치를 발견해 제품에 적용한다면 충분히 재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올해 ‘R&D의 재발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공공 분야 R&D 성과물 중에서 잠재적인 시장가치가 있지만 아직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발굴하여 민간 부문에 이전시키고 사업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현재 국가기술은행(NTB)에 등록돼 있는 기술 중에는 지금 당장 쓰이지 않아도 향후 다양한 제품에 채택할 수 있는 요소기술, 몇 단계 과정을 거쳐야 제품에 쓰일 수 있는 초기 단계 기술이 많은데 이를 활용해 상용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R&D 재발견 프로젝트 사업은 기술을 이전하려는 공공연구기관이 기술을 이전받는 중소·중견기업과 함께 컨소시엄을 이뤄 참여할 수 있다. 발굴된 기술의 추가 상용화 개발 지원 비용으로는 약 100억원이 쓰일 예정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정부 연구개발(R&D) 사업은 ‘실속이 없다’는 지적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90%가 넘는 성공률에 비해 사업화 성공률은 2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70%)이나 일본(54%)에 비해 상당히 저조한 수치다. 대학이나 공공연구소, 정부출연연구소들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개발해 놓은 기술 중에도 아직 시장에서 성과로 연결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매년 17조원가량의 국가 예산을 연구개발 분야에 투입하고 있지만, 정작 개발해 놓은 기술을 사업화하는 노력은 부족하다는 평가다. 정부가 R&D 과제 지원뿐만 아니라 미활용 특허기술의 사업화 및 성과 확산에도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기술개발에 임하는 연구자들도 발상의 전환을 할 때다. 필요한 기술을 반드시 ‘개발하겠다’는 생각도 좋지만, 기존에 개발해 놓은 기술 중에서 ‘발굴하겠다’는 시각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되던 기술에서 숨어 있던 시장 가치를 발견하고 재활용하는 것은 신규 개발에 따른 시행착오도 줄이고 기술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있다. KIAT는 다음 달 초까지 R&D의 재발견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관과 기업들의 신청을 받는다. 주어진 재료를 잘 다듬고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요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능력 있는 요리사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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