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MC 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두려웠지만 또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덥석 잡았다. 이번 프로그램(‘그대가 꽃’)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눈물이 참 많이 난다. 너무 울어서 걱정이다. 안 울면서 진행하는 게 목표다.”
지난 1월부터 방송된 토크드라마 ‘그대가 꽃’MC가 인순이(58)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전문가, 대중매체, 그리고 시청자 상당수가 우려를 표명했다. 인순이가 한번도 MC로 나선 적이 없는데다 진행자로서의 갖춰야할 능력에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순이는 우려가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잘 보여줬다. 그리고 지난 2월 12일 한달여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MC로서의 소회를 밝혔다.
물론 우려가 많은 상황에서도 제작진과 상당수 시청자는 인순이가 MC로서의 성공을 믿었다. 왜냐하면 인순이가 그동안 연예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치열한 노력으로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며 값진 성공을 일궈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과 대중매체가 묘사하는 인순이의 수식어는 성공의 단적인 증표다. ‘한국 최고 가창력의 가수’, ‘한국 디바의 최고봉’‘세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팬을 확보한 스타’‘폭발적인 카리스마와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가수 여왕’‘판소리에서부터 댄스까지 모든 음악을 소화하는 이 시대의 여자 가객’… 인순이는 말했다. “나 자신에게 박수치고 ‘진짜 멋져’라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내가 봐도 정말 근사하고 멋지게 살아온 걸요. 내 앞에 많은 장애물도 헤쳐가면서 말이에요.”
한때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인순이. 이제 그녀 이름은 우리에게 희망과 감동의 등가물이자 값진 성공의 아이콘이다. 인순이는 혼혈아로 태어나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생업현장에 뛰어드는 등 너무나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자신의 노력만으로 연예인으로 성공해 어려움과 고통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후배 혼혈가수 소냐는 말했다. “인순이 선배는 존재 자체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인순이 선배는 한때 삶 자체가 고통이었지만 그 고통에 굴하지 않고 아름다운 자신의 꿈을 키우고 실현시켰으니까요. 저 역시 인순이 선배 같은 길을 가고 싶어요.”
인순이의 연예인으로서의 성공의 가장 큰 의미는 신문 방송 등 대중매체에서 조건반사적으로 수식하는‘시련을 이겨낸 입지전적인 스타’라는 표현에서 찾아야한다. 인순이는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흑인 아버지 사이에 혼혈아로 태어난 순간부터 차별과 편견 속에 던져졌다. 오죽했으면 인순이가“학교 다닐 때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자랐다. 여기에 그녀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채 생업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혼혈아, 학력, 경제력, 아버지 부재 등 우리 사회에서 힘든 경우의 수를 모두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바로 1978년 3인의 여성 그룹으로 결성된 희자매다. 희자매 때 인순이는 빼어난 댄스와 가창력을 발휘했지만 대중의 시선은 이색적인 혼혈아 외모만을 향했다. 이때 인순이는 이를 악물었다.
인순이는 “20대 때 유일한 바람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살아 남자였지요. 힘든 걸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잠깐 오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이길 수 있었어요. 인생을 살면서 돌부리에 채이고, 눈도 맞고, 비도 맞는 거로 생각하면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순이의 성공은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하는 놀라운 자세와 노력이 한몫했다. 혼혈아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대중의 시선에 대해 “내가 합리화시키려고 너무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외국에도 차별은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엔터테이너입니다. 어떤 거라도 돋보이면 된다고 생각 했어요”라는 인순이의 말은 자신의 아픔마저도 긍정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힘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인순이의 성공에서 의미있는 것은 성공을 이룬 것보다 성공을 수성하는 노력이 더 치열했다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은 최고의 자리에 이르면 자만하게 되고 노력을 하지 않게 돼 성공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뛰어난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보여온 인순이는 가수로서 꿈의 무대인 카네기홀 공연을 하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지만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음악적 실험, 새로운 장르의 도전, 무대의 규모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인순이는 “춤을 추더라도 안정적으로 노래를 끌고 가야 합니다. 숨차서 헉헉대면 ‘인제 그만 하지’ 소리 들을 수 있으니까요. 댄스곡이 있으면 뛰면서 연습합니다. 후배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늘 새로운 음반을 구입해 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인순이에게 “정말 프로다”라는 말을 하자 돌아오는 대답은 “프로정신은 거창한 거 같고 살아남겠다고 생각이었어요. 오랫동안 살아남으려고 쉬지 않고 노력했어요”였다.
“2006년 9월 4일, 제 인생에 전부였고 가장 소중한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때도 공연장에서 공연했죠. 관객들에게 아무 내색도 않고 웃고 떠들며 활기차게 공연을 했죠”라는 인순이의 말은 그녀가 얼마나 처절하게 자신의 무대를 꾸미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인순이의 성공은 이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멍에처럼 짊어진 편견과 차별, 궁핍에 굴복하지 않고 이겨내며 체득한 생명력,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삶의 긍정성, 그리고 오늘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 무시를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태도 등이 어우러진 결과물의 총아다.
그리고 인순이의 성공이 의미 있는 빛을 발산하는 것은 그녀가 성공으로 얻은 유명성과 인기를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는데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순이는 다문화 가정 자녀 등 자신처럼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가 필요한 데는 늘 달려가려고 해요.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잖아요. 저는 힘든 시절과 시련을 겪었을 때 저에게 내민 따뜻한 손길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힘이 되는지를 너무나 잘 기억해요. 작은 사랑이지만 늘 내 손을 내밀려고 노력해요.”
이 때문에 수많은 대중은 인순이야 말로 진정 값지고 의미있는 성공을 이룬 스타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