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까치도 설명절을 쇠나요?

입력 2015-02-1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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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설 전날이면 온 식구가 행사를 치르듯 공중목욕탕에 가서 해묵은 때를 벗겨 냈다. 집에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고 실내 목욕탕이 없는 탓도 있지만 청결한 몸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조상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론 때문이었다. 목욕객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잡으면 어머니 손에 들린 때수건(일명 이태리타월)이 등부터 공격해 왔다. ‘아얏’ 소리를 내며 때수건을 요리조리 피해 보지만 결국 눈물을 한 바가지는 흘려야 목욕은 끝이 났다. 빨대 꽂은 요구르트에 겨우 마음을 달래며 옷장 앞에 서면 이상하게도 꼭 같은 반 남자애와 눈이 마주쳐 홍당무가 되곤 했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집에 오면 어머니께서 고운 설빔을 내어주셨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노래가 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작곡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고 윤극영 선생을 좋아한다. “모두 동심으로 살면 사회가 밝아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윤 선생의 동요는 나이와 상관없이 영혼을 맑게 해 준다. 한글을 처음 배우면서 마주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반달’과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의 ‘설날’은 마흔 중후반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애틋함과 설렘을 전한다. 아마도 노랫말에 윤 선생의 한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100편이 넘는 동요를 남긴 윤극영 선생은 1920년대 초반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색동회를 결성해 일제 암흑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한 아동문학의 선각자였다.

그런데 윤극영 선생이 작곡·작사한 동요 ‘설날’에 나오는 ‘까치’를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도와주는 까마귀와 까치 다리(오작교)의 까치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조류인 까치도 우리처럼 설 명절을 쇨까? 결론부터 말하면 까치설날의 까치는 새가 아니다. 작다는 뜻의 순 우리말 ‘아치’가 시간이 흐르면서 ‘까치’로 음이 변한 것이다. 따라서 까치설날은 ‘작은 설날’, 즉 설날 전날인 섣달그믐을 뜻한다. 까치설날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있다. 이를 ‘묵은세배’라고 한다. 까치설날, 섣달그믐, 묵은세배는 하나의 단어이므로 반드시 붙여 써야 한다. 기자도 어린 시절 작은 설날인 까치설날에 설빔을 예쁘게 차려입고 아버지와 함께 큰아버지 댁에 가서 어른들께 세배를 드린 기억이 또렷하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면 차례상 준비를 거의 마무리하신 어머니께서 시원한 식혜와 다식을 주셨다.

설날 아침 지내는 제사는 차례(茶禮)이고, 어른을 찾아뵙는 일은 세배(歲拜)다. 그런데 지난해 설을 앞두고 ‘세배 투어’에 나선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버스에 세배를 ‘새배’로 잘못 표기해 망신을 당했다. 당시 김 전 대표가 타고 다닐 버스에는 “국민께 새배드립니다”, “설맞이 봄맞이 새배하러 갑니다!”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인쇄업자, 당 관계자 등 누구의 실수인지 가려지지 않았지만 이 일로 우리말 표기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내친김에 세뱃돈, 세배돈의 올바른 표기도 알고 가자. 소리가 덧나는 고유어와 한자어의 합성어는 사이시옷을 넣기로 한 원칙에 따라 한자어 ‘세배’와 고유어 ‘돈’의 합성어는 세배똔, 세밷똔으로 발음하고 ‘세뱃돈’으로 써야 올바르다.

설은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는 날이라 해서 세수(歲首)·원일(元日) 등으로도 불린다. 이날 빠질 수 없는 게 있으니 바로 덕담(德談)다. 덕담은 건성으로 건네는 인사와 달리 상대방의 복을 바라는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설날 아침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면 세뱃돈과 함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등 덕담 하나씩을 붓글씨로 써 주시곤 했다. 이투데이 독자들께도 이 기회를 빌려 감사의 세배와 함께 건강과 행복을 진심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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