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지도자의 시간

입력 2015-02-1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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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은 표지가 단순하다. 재임연도 2008~2013이라는 표기와 걸어가는 모습이 전부다. 이 전 대통령은 걸어가면서 왼쪽의 누군가를 보며 웃고 있다. 왜 이런 사진을 썼을까. 그 자신을 근엄하게 돋우는 근영(近影)도 아니고 여러 사람과 어울린 행복한 장면도 아니다.

굳이 이 사진을 쓴 것은 늘 바쁘게 움직이면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해 온 용의주도함을 강조하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대통령이 되기 전 어느 술자리에서 “나는 지금 내 뒤에서 누가 뭘 하는지 알 수 있다. 뒤에도 눈이 있다”고 말하던 모습과 겹친다.

그러나 그 표지의 모습은 앞으로 걸으면서 다른 쪽도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쪽을 보느라 제대로 앞으로 걷지 못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말하자면 해찰을 부리는 것이다. 이 말은 딴 길로 새는 것,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하는 걸 일컫는 사투리이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편하게 이것저것 살피는 산책길의 해찰(解察)과는 의미가 아주 다르다.

책 제목 <대통령의 시간>도 소통과 공감의 언어가 아니라 독점과 배제의 언어로 읽힌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른다. 그러나 그 시간의 값은 나이와 성별, 신분과 직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남들이 시간의 값을 크게 쳐주는 사람일수록 그에 걸맞은 일을 충실히 해야 한다. 더욱이 대통령의 시간은 그저 부여(賦與)된 시간이 아니라 선거에 의해 허여(許與)된 시간이다. ‘대통령의 시간’은 당초부터 ‘이명박의 시간’이 아니라 ‘국민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 회고록이 비판을 받는 동안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이 타계했다. 그의 ‘대통령의 시간’은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 그러니까 이 전 대통령 재임기간의 2배다. 바이체커는 훌륭한 인품과 진지한 연설로 독일 국민은 물론 국제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지성인이다. 그는 취임 후 처음 맞은 독일 패전일(1985년 5월 8일) 연설을 통해 그 패전이 해방이었으며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한 희망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패전이 해방인지 굴종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가자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독일의 정체성을 확립한 명연설이었다.

또 통일 독일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을 선포하는 연설에서 “통합은 나눔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합(合)과 분(分)이 절묘하게 결합된 메시지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퇴임 후에는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와 함께 이른바 ‘독일 현인’ 구성원으로서 현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국민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시간을 들여 연설 구상을 했고, 자신이 직접 글을 썼다. 회고록도 냈지만 물의가 빚어진 일은 없었다.

대통령이라면, 전직 국가원수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지도자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해야 하지만 그 일의 가장 중요한 고갱이는 시대와 국민에 대해서 말을 거는 것이다. 시대와 국민을 향해 말하는 게 아니라 시대와 국민에게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든 박근혜 대통령이든 다 마찬가지다. 특히 박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 된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산업화→민주화→정보화의 이행을 거쳐온 시기에 대통령이 됐으면 통합의 정치, 합류의 메시지를 송신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암덩어리, 단두대, 원수 이런 식의 살벌한 공격적 언어가 연발되고 있다.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과 그의 재임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의 대화록이 최근 번역 출판됐다. 말로가 기록한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소설가 알베르 카뮈와의 문답이다. 카뮈가 “작가는 어떻게 프랑스에 봉사할 수 있나요?” 하고 물은 데 대해 드골은 “글 쓰는 모든 이, 글 잘 쓰는 모든 이는 다 프랑스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작가만이 아니다. 글을 잘 쓰는 것, 말을 잘 하는 것은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다. 바이체커나 드골이 ‘지도자의 시간’을 통해 사람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독서와 사려, 분별이 부럽다. 그리고 우리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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