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철의 아하!] 연말정산, 거위에서 원숭이까지

입력 2015-01-2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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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국장

“예술적인 과세는 거위가 비명을 덜 지르게 하면서 최대한 많은 깃털을 뽑는 것과 같다.” ‘태양왕’ 루이14세의 재무장관이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갈파한 세금 징수의 기술이다. 1년 5개월 전, 연말정산 개편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을 끌어다 쓴 당시 경제수석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국민을 거위에, 세금을 깃털 뽑기에 빗댄 발언은 공직자로선 너무나 부적절한 비유라는 질타였다. 이 바람에 17세기 ‘거위 재상’은 한국에서 교활하고 혹독한 세리(稅吏)의 전형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콜베르는 억울하다. 알고 보면 콜베르가 집중적으로 털을 뽑은 17세기 프랑스산 거위는 21세기 한국 거위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에선 털 뽑기가 가장 쉽다는 근로소득자가 주 대상이지만 당시 프랑스에선 직접세에서 면세 혜택을 누리던 성직자와 귀족 등 힘세고 드센 거위가 주 타깃이었다. 가짜 귀족도 적발해 세금을 물리고 소금 밀매 등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세원도 크게 늘렸다. 번득이는 정책 아이디어와 단단한 용기가 없었다면 첫발조차 내딛기 힘들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은 미션 임파서블 같다. 차와 포를 다 떼고 난공불락 같은 134조원 고지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임무엔 콜베르 같은 인물이 적임자다. 그는 면세 축소, 탈루소득 과세 등 현란한 간접 증세를 동원해 프랑스 왕실 재정 순수입을 10년간 2배로 늘렸다.

17개월이 흐른 지금, 연말정산으로 또 난리다. 예상 환급액을 따져 보니 정부의 설명과 달리 대폭 줄거나 심지어 토해내야 할 사람까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13월의 보너스’가 ‘13월의 세금 폭탄’이 됐다는 비명까지 터져나오고 있다. 급기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20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자녀 수, 노후대비 등을 감안한 근로소득세 세제개편 방안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보완책마저 돌려받는 금액에 차이가 없고 세금 부담이 그대로여서 간이세액표 조정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원숭이한테나 통할 법한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불과하다는 비판론에 묻히고 있다.

복지를 위해 고소득자가 저소득자보다 세금을 다소 더 내는 가벼운 부자증세에 민심이 이토록 들끓고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유는 딴 곳에도 있다. 당장, 정부의 태도부터 마음에 꽂히는 듯하다. 탈세가 만연하다는 변호사, 의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나 수백조원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 있는 기업은 결과적으로 방치한 채 만만한 월급쟁이의 유리지갑만 노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조류인 거위에서 영장류 원숭이로 진화했지만, 여전히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서글픈 느낌일 것이다.

게다가 저출산과 고령화 같은 중대한 시대적 과제를 담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정부가 역행하는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출산공제와 입양공제, 다자녀 추가공제 혜택이 폐지됐고, 근로소득공제도 줄고, 국민연금 혜택도 줄었다. 이에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30대 부부와 교육비 지출이 커지는 40대, 연금저축으로 노후를 대비해야 할 50대 모두 세금 부담을 안게 됐다.

최근 주요 조사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취임 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핵심 지지층인 영남과 50·60대 등 ‘집토끼’들이 이탈하면서 40%대 콘크리트 지지층이 균열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파동 등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된 것이 직격탄이 됐지만, 정작 진짜 진앙지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다. 당장 담뱃세 인상과 연말정산 축소에 이어 주민세와 자동차세까지 각종 세금이 줄줄이 오를 예정이다. 팽창 예산에 맞춰 세금을 급히 뽑아내려다 보니 손쉽게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월급쟁이에 증세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지난해 몰아친 명퇴 칼바람에 386 베이비부머까지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등 고용불안이 가중되고 있고 공무원 가족들은 연금 개혁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번 지지율 하락은 정치적 이벤트에 따른 일회성이 아니라 회복하기 만만치 않은 구조적 약세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장이다. 한창 기세가 올라야 할 집권 3년차 정부의 무력화는 국민의 불행이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지지선도 저항선으로 돌연변이하고 만다. 쇄신과 소통이 더욱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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