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휴대전화 벨소리가 정적을 깼다. “장지혜 프로입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다. 한때 여자골프 대표 상비군으로 활약했고, 김하늘(27ㆍ하이트진로)과 함께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의 촉망받던 신예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래서 더 놀랍고 반갑다. 그는 2년 동안 중국에서 투어를 뛰었다고 했다. 지난 2012년 성적 부진으로 KLPGA투어 시드를 잃고 2년간 중국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지난해 말 KLPGA투어 시드 순위전을 17위로 통과하며 거짓말처럼 올 시즌 출전권을 따냈다.
하지만 그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으로 접어들었다. 국내 무대에서 뛰는 여자 선수 중 최고령에 속한다. 그래서 그에게 부끄러운 질문을 던졌다. “나이 때문에 힘들지 않겠냐”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았다. “어린 선수들보다 체력은 밀릴 수 있어도 연습량은 밀리지 않는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운동선수의 성적은 훈련 량과 비례할 뿐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단다.
그의 직격탄이 가슴 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지난해 장지혜의 1년 후배 윤채영(28ㆍ한화)은 프로데뷔 9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장 프로 차례”라며 기분 좋은 상상을 선물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뜻밖의 답변을 들었다. “우승에 차례가 있나요?” 선배들이 어린 선수들에게 밀리는 건 체력적 한계보다 노력도 정신력도 부족한 때문이란다.
여전했다. 짧은 전화통화에서 강직한 그의 품성을 오랜 만에 확인할 수 있었다. 2년이 흘렀지만 그의 품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전부 맞는 말이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오래도록 정상급 기량을 유지하는 노장 선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해 K리그 최우수선수 이동국(36ㆍ전북), 통산 9번째 프로야구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이승엽(40ㆍ삼성), 프로야구 현역 최고령으로 여전히 건재함을 입증한 이병규(41ㆍLG)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십수년간 정상 자리를 지켰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초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45)는 지난 2007년 동아마라톤에서 37세의 나이로 정상에 올랐다. 그는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중고 취급 받는 것이 싫어 더 노력했다고 한다.
어디 운동선수들만의 문제일까. 우리는 나이와 업무 실적의 미묘한 상관관계 속에서 끝없는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경쟁조차 해보지 않고 스스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이도 적지 않다. 그들의 핑계는 늘 나이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일본의 골프전문 카메라맨이던 사에구사 스스무(78) 씨는 선수들이 나이를 들면서 체력이 떨어지는 시기보다 초심을 잃는 시기가 더 빠르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체력 저하 원인은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장지혜는 탁월한 기량을 가진 선수가 아니다. 굵직한 실적도 없다. 하지만 초심이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증가다. 끝난 줄만 알았던 그의 골프인생도 초심이 있어 다시 살아났다. 나이로 인해 도전 자체를 회피하는 우리 사회 ‘젊은 환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