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워 아이 리솽(我愛麗爽)”

입력 2014-12-1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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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미래설계연구원장

어느 날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내 오른쪽에 트레이닝복 같은 걸 입은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잘 입는 이른바 ‘야구잠바’ 차림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걸 ‘야구잠바’라고 부르는지는 몰랐다. 나중에 들으니 원래 체육대 학생들(그러니까 선수들)이 입던 유니폼이었는데 편하고 따뜻해서 지금은 누구나 교복처럼 입고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젊은이의 왼쪽 소매 끝 부분에 ‘我愛麗爽’이라는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우리말로 읽으면 ‘아애려상’이고, ‘나는 려상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체육복에 이름을 새긴 것으로 미루어 농구나 배구, 아니면 야구스타 팬클럽의 단체복이 아닌가 싶었다. 려상은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지만(일단 내가 모르는 사람이니까) 꽤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매를 가리키며 “이게 누구지요?”하고 물었다. 그 대학생은 옆자리의 여학생을 가리키며 “얘가 리솽이에요.”하고 알려주었다. 워 아이 리솽, 그는 발음도 유창하게 중국어로 읽으며 자기 애인은 중국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알려 주었다. 성까지 부르면 왕리솽(王麗爽)이라고 말했다.

참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麗는 곱다, 우아하다는 뜻이고 爽은 시원하다, 마음이 맑고 즐겁다, 밝다는 뜻이니 이보다 더 좋은 단어 배합이 있을까. 상쾌하다고 할 때의 그 글자다. 가을날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매우 상쾌하다는 삽상(颯爽)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소리가 맑고 우렁차다, 깔끔하고 탁 트였다는 상량(爽亮), 시원하고 서늘하다는 상량(爽凉) 등 이 글자가 들어간 말치고 나쁜 게 하나도 없다.

알고 보니 학생들은 그렇게 소매 끝에 자신의 이름이든 누구의 이름이든 새기고 있었다. 리솽이라는 여학생의 소매에는 뭐라고 씌어 있는지 궁금했지만, 내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물어봐도 될 텐데 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등에는 어느 대학의 글로벌 스튜던트 유니온이라고 영어로 씌어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말로 지구촌 대학생연합회였는데, 정확한 명칭을 알기도 전에 그들이 어떻게 만나 어떻게 사귀어왔는지 대충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두 남녀는 그들이 다니는 대학 역에서 손을 잡고 조용히 일어서서 나갔다. 등번호는 남자가 21번, 여자가 13번이었다. 왜 그 번호를 새겼는지, 21번과 13번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지만 당연히 그들만이 아는 의미가 담긴 숫자였을 것이다.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이뻐 보여서 행복하라고 빌어주고 싶었다. 아울러 내 젊은 시대의 사랑과 비교돼 부러웠다.

내가 보낸 편지에 뭐라고 답을 했을까, 며칠 만에 온 그녀의 답장을 읽고 또 읽고 더 읽고 다시 읽곤 했던 안타까움, 손 한 번 잡으려고 온갖 꾀를 다 내던 어리숙함, 음악감상실에 나란히 앉아서 속삭이곤 했던 멋없는 데이트, 이런 것들과 비교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얼마나 당당하고 밝은가.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지하철 안에서 너무 끌어 붙안고 뽀뽀하고 머리 매만지고 그러지는 마라. 춥다고 남자의 코트 속에 들어가 남자를 우러러보면서 너무 애교 떨고 그러지 마라. 내 친구 중 한 녀석은 그런 걸 보면 “얘들아, 아주 여관에 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요즘 꼴불견 젊은이들을 하도 자주 보아서 점잖았던 ‘워 아이 리솽’ 남녀가 더 돋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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