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개고생, 막춤 그리고 참홍어

입력 2014-12-05 15:24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편집부 교열기자

“오, 완전 개맛이야.” “지금 너 표정 개웃겨.”

야간자율학습으로 지쳐 있을 큰딸아이를 데리러 간 학교 앞 분식집. 옆자리에 앉은 여고생 둘이 떡볶이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개맛이라니. 은어는 또래 등 집단 구성원 간의 유대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집단 내부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그들끼리만 통용되는 특수한 언어인 셈이다. 따라서 은어는 구성원 간에 강한 소속감을 유지토록 해 친밀감을 더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개-’의 경우는 특이하다.

대개 우리말에 접두사 ‘개’가 붙으면 그 원형보다 질이 떨어지거나 열등하다는 뜻이 된다. 대표적인 예로 복숭아는 좋은 과일이지만 개복숭아는 모양과 빛깔이 좋지 않으며 맛도 쓰다. 그런데 청소년 사이에 유행하는 ‘개’는 강조용법으로, 안 좋은 것은 더 안 좋게 좋은 것은 역설적으로 더 좋게 부각한다. ‘개못생겼다’ ‘개후지다’ ‘개짱난다’ ‘개멍청하다’ 등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개좋다’ ‘개멋지다’ ‘개예쁘다’ ‘개잘한다’ 등은 좋은 의미를 강조한다. 긍정의 부정적 재강조가 특이한 화법으로 ‘개’의 화려한 비상이 아닐 수 없다.

접두사 ‘개-’는 다양한 의미로 활용된다. 먼저 부정의 의미로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한다. 개망신, 개고생, 개잡놈, 개망나니 등이 대표적이다. ‘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기도 한다. 개꿈, 개나발, 개수작, 개죽음을 들 수 있다. ‘개꿈’을 개가 나오는 꿈으로 아는 이가 많은데, 헛된 꿈을 일컫는다. 또 ‘개-’는 ‘야생 상태의’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할 때도 쓰인다. 벌집에 들어 있는 야생의 꿀이 ‘개꿀’이다. 노깨, 나깨, 보릿겨 따위를 반죽해 아무렇게나 반대기를 지어 찐 떡은 ‘개떡’이다. 개살구는 살구에 비해 맛이 시고 떫다. 많은 사람들이 ‘개-’가 붙는 말은 어감이 자극적이고 듣기에 거북해 비속어로 알고 있는데 이들 단어 모두 사전에 올라 있는 표준어다.

‘개’와 비슷한 운명을 지닌 말로 ‘막’자가 있다. 막국수, 막김치, 막장(허드레 된장), 막소주, 막회 등은 다듬어지지 않아 품질이 낮고 거친 음식을 의미한다. 또 막사발, 막일, 막노동, 막춤 등은 조악하고 성글어 세밀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것을 이른다. 그런데 이들 단어는 민초의 거친 삶에서 생겨나고 농익은 파격(破格)의 멋이 정감을 불러일으켜 애착이 가는 것이기도 하다.

‘개-’의 반대 의미로는 ‘참’이 있다. 참사람, 참사랑, 참교육, 참일꾼 등 ‘진실하고 올바른’ 혹은 귀하고 좋은 것에 마치 훈장처럼 ‘참’을 붙인다. 따라서 ‘참-’이라는 앞가지가 붙으면 생김새와 품질 등이 뛰어난 것임을 뜻한다. 깨 중에 최고는 참깨이며, 그걸로 짜낸 기름 역시 참기름이다. 나물 중에도 으뜸으로 치는 건 참나물이고 참복어, 참다랑어, 참조기, 참꼬막, 참버섯 등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홍어 좀 먹어봤다는 미식가들은 참홍어가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는다.

언어는 살아 움직인다.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 청소년 사이에 유행하는 ‘개-’는 의식의 전도라고 봐야 할 듯하다. 그런데 문득 이러다 모범적이고 훌륭한 인품을 지닌 교사가 ‘개선생’으로 불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참교사의 참교육이 절실한 시점이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