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주유소가 자사 석유제품만 구매하도록 하고 이를 어길 경우 불이익을 주는 등 불공정거래를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국내 정유 4사가 첫 재판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류지미 판사는 20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HD현대오일뱅크·SK에너지·에쓰오일·GS칼텍스 등 정유 4사와 직원 4명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검찰은 정유 4사가 자영주유소와 전량구매계약을 체결한 뒤 정유사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가격에 자사 석유제품을 전량 구매하도록 했다고 보고 있다. 계약을 위반한 주유소에는 혜택을 박탈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불이익을 줘 다른 정유사의 더 저렴한 제품을 공급받을 기회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거래상 지위를 남용했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HD현대오일뱅크에는 경쟁사와 가격 정보를 교환해 가격 결정에 반영한 혐의도 적용됐다. 검찰은 HD현대오일뱅크 가격결정부서 부서장이었던 A 씨가 경쟁사 관계자와 입금가 정보를 공유하고, 미국·이란 전쟁 발발 직후 SK에너지 가격결정 담당자와 입금가 인상 수준을 합의한 것으로 봤다.
검찰이 파악한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의 담합 규모는 약 14조2000억원이다. 에쓰오일과 GS칼텍스가 이들의 가격을 참고해 인상한 효과까지 포함하면 약 26조원 상당의 경쟁제한 효과가 발생했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정유 4사는 이날 관련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HD현대오일뱅크 측은 “공소사실을 보면 정유업계에 구조적인 비리나 담합이 만연하고 그것이 이란 전쟁 당시 정유가격이 오르는 데 영향을 미친 것처럼 돼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라며 “검찰 조사가 워낙 짧았고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기소돼 사실관계를 밝히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SK에너지 측은 전량구매계약이 공정거래위원회의 검토와 시정명령 등을 참고해 체결·운영돼 왔다며 “기소된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에쓰오일 측도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주장한다”며 증거기록을 추가 검토한 뒤 구체적인 의견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GS칼텍스 측은 자영주유소가 계약 체결 단계에서 여러 정유사와 계약 방식 가운데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며 전량구매계약이 불공정거래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HD현대오일뱅크와 GS칼텍스에는 공정위 조사방해 혐의도 있다. 검찰은 두 회사 직원들이 공정위 현장조사 가능성을 인식한 뒤 가격 관련 자료나 사내 메신저 대화방 등을 삭제한 것으로 판단했다.
HD현대오일뱅크 측은 조사방해 혐의와 관련해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도 해당 행위가 실효적인 조사방해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GS칼텍스 측도 직원들의 휴대전화에 관련 대화방이 남아 있었다며 조사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맞섰다.
한편 재판부는 이날 구속기소된 A 씨의 보석 심문도 진행했다. A 씨 측은 물적 증거가 이미 확보돼 추가 증거인멸 우려가 없고 불구속 상태에서 충실한 방어권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며 보석을 요청했다.
그러나 검찰은 “전쟁 후 첫 영업일부터 정유사들이 전례 없이 가격을 크게 인상한 중대 범죄”라며 A 씨가 이미 상당량의 증거를 인멸해 석방할 경우 추가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내달 22일 공판준비기일을 열어 증거에 대한 양측 의견을 정리하고 향후 심리 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