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혼자 못 바꾼다…의약품 유통혁신, 제도·인센티브 열쇠[약의 길을 바꾸자-下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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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 업체 사재기 적발 빈번…규제만 강화하면 ‘접근성 하락·소비자 부담’ 부작용 불가피

▲(사진=AI 생성)

국내 의약품 유통업계의 자생적인 디지털 전환 노력이 실제 ‘의약품 품절 사태’ 해결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개별 기업의 투자를 넘어선 정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영세 업체가 난립한 환경을 정비하고 여러 단계의 비효율적 유통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의약품 당국의 규제와 독려가 이어져야 한다는 분석이다.

20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국내 의약품 유통 시장은 중소 규모 기업들 다수가 존재하는 복잡한 구조로 형성됐다.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는 많지만, 독과점 방지와 경쟁체제 작동 등 긍정적 효과보다는 매점매석과 불법 유통 등의 문제가 오히려 크다. 이같은 시장 환경은 의료 현장의 불편으로 이어져, 재고와 수요 파악이 통합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일부 업체의 사재기 등 불법 행위를 차단하기도 어렵다.

실제 올해 상반기 중동 전쟁의 여파로 국내 나프타 등 원료 수급에 차질이 발생하자, 주사기·투약병 등 의료 소모품의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올해 5월 주사기는 14.5~34.5%, 조제약 포장지는 12~20%, 투약병은 17~20% 가량 가격이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4월 주사기 매점매석 금지 특별단속을 실시해 1차로 32개 업체, 2차로 34개 업체를 대거 적발한 바 있다.

유통망을 통합적으로 전산화하고,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는 각 기업들의 디지털 인프라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다만, 의약품 유통시장은 영세 도매업체가 다수인 만큼, 기업 내부에 자체적인 디지털 및 AI 기술 관련 인력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거액을 투입해 AI 전문 기업에 인프라 전환을 의뢰하기도 쉽지 않아 보여, 기업들의 자발적인 변화에만 시장 체질 개선을 의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의약품 유통망 선진화를 위해 무작정 규제만 강화하는 것 역시 부작용 위험이 크다.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규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투입한 비용이 의약품의 소비자 가격에 전가될 수 있어서다.

한 의약품 시장 전문가는 “의약품이 아무리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는 특수한 상품이라고 해도, 일반적인 상품처럼 생산자부터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손을 거치면서 최종 소비자 가격이 결정되기 마련”이라며 “의약품 도매상들이 약국에 넘기는 가격을 상향 조정하면, 약국에서 아무리 마진율을 유지한다고 해도 소비자들은 더 비싼 가격에 약을 사게 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의약품 유통 관련 규제 강화가 의약품 접근성을 저해하는 부작용 우려를 일으킨 사례도 존재한다. 앞서 2022년에는 콜드체인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개정된 ‘생물학적 제제 등의 제조·판매관리 규칙’이 시행되면서 생물학적제제를 배송하는 유통업체들은 수송 용기, 운송수단 설비, 기록관리 체계를 보완하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당시 의약품 유통업체들은 계도기간 식약처에 콜드체인 구축 비용 일부에 대한 지원을 마련하는 방안을 건의했으나 관철되지 않았으며, 비용 부담으로 백신과 인슐린 등의 유통에서 손을 떼는 업체들이 발생했다.

현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의약품관리종합정보센터(KPIS)를 통해 모든 전문의약품의 출하 및 공급 내역을 수집하고 있다. 또한 복지부와 식약처, 제약업계가 참여하는 의약품 수급 불안정 대응 민·관협의체를 운영한 바 있다. 다만 제도적 노력이 주로 사후 규제나 일시적인 사건에 대응하는 수준에 머물러 시장 체질 자체를 개선할 것으로 기대되는 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제약사들의 연구개발(R&D) 독려를 위해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 제도를 운영하는 것처럼, 의약품 유통사들의 혁신을 가속하는 정책 수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규제와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동시에, 일정 기준을 충족한 의약품 유통사들을 대상으로 인증을 부여하고, 공공입찰 시 가산점이나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업계를 선진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 의약품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캐나다 등 소수의 초거대 유통사가 시장을 나눠 점유하는 해외의 의약품 유통 시장과 달리, 국내 시장은 지역과 품목에 따라 영세 업체가 난립해 있어 재고나 가격 등 약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실제와 달리 왜곡된 측면이 크다”라면서 “개선의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의약품을 소비하는 환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가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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