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정책 개방 파고 ‘시험대’
과거 FTA 피해 보상 헛돌아…정부 통상 정책 향한 뿌리 깊은 불신
"피해 최소화할 촘촘한 검역 및 농가 소득 안전망 선행돼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한국 통상정책의 오래된 과제인 ‘개방의 이익을 어떻게 국내 산업의 성장으로 연결할 것인가’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제조업에는 시장 확대의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경쟁력이 취약한 농어업에는 시장 개방의 충격이 집중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9일 농어업계는 농어업의 문제가 단순히 관세가 얼마나 내려가느냐에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국내 농어업은 농업인 고령화와 농촌 인력 부족, 경지면적 감소 등 구조적인 취약성이 누적된 상태다. 생산 기반이 약해진 상황에서 수입 농축산물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 농가의 생산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CPTPP 회원국에는 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농축산업의 생산 규모와 경쟁력이 높은 국가가 다수 포함돼 있다. 시장이 개방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권 확대와 가격 안정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국내 생산자에게는 경쟁 심화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수입 확대가 모든 품목에 동일한 충격을 주는 것도 아니다. 신선 농축산물처럼 국내 생산과 직접 경쟁하는 분야는 피해가 상대적으로 클 수 있는 반면, 가공식품이나 농식품 수출 분야에서는 새로운 시장을 확보할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결국 가입 여부만큼이나 어떤 품목을 어떻게 보호하고, 개방으로 생기는 기회를 어디에 연결할지가 중요하다.

정부의 과거 자유무역협정(FTA) 피해대책이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점도 변수다. 한·중 FTA 체결 당시 농어촌 지원을 위해 조성하기로 한 ‘농어촌 상생협력기금’은 당초 목표에 크게 미치지 못하면서 농어민들의 불신을 키웠다. 새로운 시장 개방에 앞서 피해보상 대책부터 내놓아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배경이다.
통상 환경 자체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관세 인하를 통한 교역 확대가 주요 목표였다면 최근에는 공급망과 식량안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기후변화와 지정학적 갈등으로 식량 수급 불안 가능성이 커진 만큼 농업 생산 기반을 단순한 산업 보호의 대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따라서 CPTPP 가입을 추진한다면 피해 발생 후 보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개방 이전에 충격을 흡수할 안전망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 과제다. 농가 소득과 경영 안전망을 확충하고, 수입 농축산물에 대한 동식물 위생·검역(SPS)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피해가 예상되는 품목에 대한 경쟁력 제고 대책도 병행해야 한다.
통상 전문가들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고립을 피하기 위한 CPTPP 가입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내부의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승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원은 "한국은 CPTPP 후발주자로 관세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철폐돼 가입 초기 신선 농축산물 수입 충격이 일본보다 훨씬 클 수 있다"며 "국내 농가의 소득·경영 안전망을 사전에 충분히 확충하고 동식물 위생·검역(SPS) 역량을 대폭 강화하는 정교한 내부 대책 마련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공식품 등 수출 유망 분야의 기회는 적극 활용하되 신선 농축산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민관 협력 체계와 인프라 보강도 시급하다”고 밝혔다.
결국 CPTPP 가입의 핵심은 개방 자체가 아니라 개방 이후의 산업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있다. 수출 확대라는 목표와 농어업의 생산 기반 및 식량안보를 함께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보완책을 마련해야 가입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줄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