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비대칭 해소 vs 글로벌 협상력 저하 ‘딜레마’
공시 신뢰성 강화엔 공감…세부 기준 마련은 과제로

제약·바이오 기업의 공시 제도가 전면 재편된다. 연구개발과 기술이전 과정에서 투자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정보 비대칭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다만 업계에서는 투자자 보호라는 정책 방향에는 공감하면서도 글로벌 기술수출 현장에서 통용되는 비밀유지계약 관행과 충돌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자칫 해외 빅파마와의 협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31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최근 ‘제약·바이오 공시 종합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기업이 강조하는 성과보다 투자자가 실제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중심으로 공시 체계를 바꾸는 것이다.
기업공개(IPO) 증권신고서에는 예상 시장 규모와 임상시험 성공 확률, 허가·심사 리스크, 개발 기간 및 소요 비용 등을 구체적으로 기재하도록 했다. 상장 이후에는 기술이전 계약을 계약금과 개발·허가·판매 마일스톤, 로열티 등으로 구분해 공개하고 계약상 비밀을 근거로 계약 상대방을 비공개하는 경우도 상대방의 규모와 사업 역량 등 최소한의 정보를 공시해야 한다.
정기공시에는 ‘연구개발 이력관리 총괄표’를 신설해 연구개발 파이프라인의 개발 중단과 허가, 기술이전 등 전체 이력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주요 이벤트가 발생하면 수시공시에 해당 내용을 정확하게 제공하도록 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변화다. 그동안 바이오 기업들은 수조 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발표하면서도 실제 계약금과 조건부 마일스톤이 구분되지 않아 계약 규모가 과대 인식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금감원은 계약금과 단계별 마일스톤을 구분하고 지급 조건까지 함께 공개하도록 해 계약의 실질을 명확하게 전달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업계는 실제 기술수출 현장에서는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글로벌 기술이전 계약 대부분은 엄격한 비밀유지계약을 전제로 체결되는데 국내 공시 규정이 강화되면 글로벌 빅파마가 정보 공개를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바이오 기업 관계자는 “평소 공시를 충실히 해온 기업이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빅파마가 계약 내용을 세부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허용할지는 의문”이라며 “한국 기업이 추가 공개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상대방이 한국 기업과 계약을 맺는 데 부담을 느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도 “글로벌 빅파마와 계약할 때는 비밀유지 조항이 엄격한 경우가 많다”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협상 자체가 까다로워질 수 있다. 이미 투자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술수출 계약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임상시험 성공 확률을 객관적인 논문과 통계에 근거해 기재하도록 한 부분도 실효성 논란이 제기된다. 금감원은 회사별 자의적인 추정을 줄이고 비교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지만 업계에서는 활용 가능한 자료가 제한적인 만큼 대부분 기업이 같은 논문이나 통계를 인용하는 수준에 그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업계도 공시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는 방향성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최근 기술수출 계약 규모나 임상 결과가 과장되게 해석되거나 공시와 언론 보도 내용이 달라 투자자 혼란을 초래한 사례가 반복된 만큼 정보의 정확성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공시 기준이 명확해지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기술수출 계약의 경우 상대방의 비밀유지 요청이 있는 만큼 어느 수준까지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다. 자칫 세부 내용을 지나치게 공개하면 사실상 계약 내용을 모두 알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며 “기술수출 공시 기준이 새롭게 마련되는 과정인 만큼 기준을 구체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