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화폐는 이미 전국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활용하는 대표적 지역경제 정책이 됐다. 정부는 올해 발행 규모를 24조원 수준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그러나 발행액이 늘면 최대 10%에 이르는 할인보조금과 함께 운영비 부담도 커진다. 부정 유통을 적발하고 미사용액을 회수하는 데 행정력이 들며, 실제로 어느 상권과 업종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정확히 평가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이제는 논의의 중심을 ‘얼마나 발행할 것인가’에서 ‘얼마나 큰 경제적 효과를 낼 것인가’로 옮겨야 한다.
그동안 지역화폐의 디지털화는 종이상품권을 카드나 앱으로 바꾸는 데 머물렀다. 진정한 디지털 전환은 결제수단의 외형이 아니라 정책 집행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지역화폐에 블록체인 기반 프로그래머블 머니를 활용하면 지역·업종·기간 같은 조건을 지급수단에 담아 자동으로 적용할 수 있다. 목적에 맞지 않는 결제는 거래 단계에서 제한하고, 기한이 지난 미사용액은 자동으로 회수하며, 집행 현황을 실시간에 가깝게 파악할 수 있다. 사후 적발과 환수에 의존하던 정책을 사전 예방과 자동 집행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주민과 소상공인의 편익도 기대된다. 주민은 별도의 쿠폰이나 복잡한 절차 없이 조건에 맞는 혜택을 결제 과정에서 적용받을 수 있다. 소상공인은 수수료 부담을 줄이고 결제와 대금 정산 사이의 시간을 단축해 자금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의 일부는 기존 카드형 지역화폐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 조건을 지급수단 자체에 담고 집행과 정산을 자동으로 연결하는 보다 근본적 혁신에는 프로그래머블 머니가 필요하다.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과 예금토큰이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법·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현시점에서는 한국은행이 ‘프로젝트 한강’에서 실증하는 예금토큰이 현실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직 상용 지급수단으로 완성된 단계는 아니지만, 실제 결제와 프로그래머블 기능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앞으로 사용처와 기능도 확대할 계획이다. 정부와 공동으로 추진할 블록체인 기반 국고금 집행 실증도 공공자금의 조건부 집행이라는 점에서 지역화폐 혁신에도 참고할 만하다.
싱가포르의 실험은 이러한 전환이 단순한 구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싱가포르는 프로젝트 오키드(Project Orchid)를 통해 예금토큰 등 디지털화폐에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 계약을 결합한 목적제한화폐를 실증했다. 지급 대상과 사용처 등의 조건을 거래 단계에서 자동 실행함으로써 정부 지원금의 효율적인 집행 가능성을 검증한 것이다. 이는 지역화폐가 단순한 모바일 상품권을 넘어 정책 조건을 자동 실행하는 프로그래머블 지역화폐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결제 기술의 도입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 지역화폐의 집행과 평가를 얼마나 정교하게 바꿀 수 있느냐이다. 이제 지역화폐도 더 많이 뿌리는 정책에서, 같은 예산으로 주민이 체감하는 혜택과 지역경제 효과를 높이는 프로그래머블 정책 수단으로 진화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