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산업 성과에 ‘구조 약점’ 덮여
개혁 고삐 죄어 지속성장 이어가야

최근 한국 경제를 보면 다소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500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는 여전히 한국 경제의 부담이고, 내수는 좀처럼 살아나지 못한다. 지방경제의 어려움도 계속되고 있으며 양극화와 체감경기 악화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 정도 상황이라면 경제 전반에 대한 비관론이 커질 법하다.
그런데 실제 분위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AI 열풍과 함께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최근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반도체 수출이 크게 늘면서 경상수지는 상당한 규모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주식시장도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코스피 9000, 나아가 10,000 시대를 전망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반도체 기업에서는 수억원대 성과급 지급 소식이 이어지고 백화점 명품관은 다시 북적인다.
겉으로 보면 한국 경제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지금 한국 경제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반도체와 일부 수출 대기업이 보여주는 모습을 한국 경제 전체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자 앞으로도 더욱 키워야 할 산업이다. 문제는 반도체가 아니라 반도체가 만들어내는 ‘착시’다. 최근 한국 경제의 긍정적 지표 상당 부분은 반도체와 일부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다. 수출 증가도, 경상수지 흑자도, 주가 상승도 상당 부분 반도체 산업이 이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경제 전체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는 호황이지만 내수는 부진하다. 대기업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지만 자영업자는 여전히 어려움을 호소한다. 주가는 상승하고 있지만 그 과실이 모든 투자자와 국민에게 고르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경제를 바라보는 체감 온도는 여전히 낮다.
경제를 읽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일부의 성공을 전체의 성공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반도체 산업의 눈부신 성과에 가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대목에서 문득 1990년대 중반이 떠오른다. 당시에도 ‘신경제’에 대한 기대가 높았고 개인용 컴퓨터 보급 확대와 함께 반도체 산업은 호황을 누렸다. 수출은 늘었고 경제에 대한 낙관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기업 부채가 빠르게 증가하고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이 커지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그러한 위험 신호를 충분히 읽어내지 못한 채 외환위기를 맞았다.
물론 지금의 한국 경제를 당시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외환보유액을 크게 확충했고 금융시스템도 한층 견고해졌다. 외환 체력만 놓고 본다면 지금의 한국은 1997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 그러나 성장 체력은 어떠한가. 내수와 투자, 생산성, 지역경제의 활력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경제는 여전히 적지 않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외환 체력은 강해졌지만 성장 체력은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금이 1997년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특정 산업의 성공이 경제 전체에 대한 판단을 흐릴 수 있다는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경제가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거나 개혁을 미룬다면 미래에는 더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가계부채와 내수 부진, 지방경제 침체, 양극화와 같은 문제는 반도체 호황이 가려줄 수는 있어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희망이다. 그러나 반도체는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을 뿐, 한국 경제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도체 호황에 안도하는 일이 아니다. 반도체 밖의 한국 경제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구조적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일이다. 그래야 반도체 호황은 일시적 착시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