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휘은의 AI 이야기] 인간 사용 설명서, 개정판

우리를 대신할 수 없는 것

▲반휘은 칼럼니스트/ AI컨설턴트. (출처=본인 제공)
얼마 전 친구가 보낸 기사 헤드라인이 기억에 맴돈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신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상표로 보호하기 위한 법적 절차에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스위프트는 저작권 보호와 분쟁에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저작권의 언어를 가장 대중적으로 다룰 줄 아는 스타 중 하나다. 매니지먼트와의 불화 이후 초기 음원 마스터권을 둘러싼 분쟁 중 기존 앨범을 다시 녹음해 ‘테일러 버전’이라는 이름으로 되찾았고 (이 명칭은 소셜 미디어에서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매김하며 그녀의 저력을 보여줬다), 창작자가 자신의 산물을 소유한다는 말이 음악 산업에서 어떤 현실적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번에 보호의 대상이 된 것은 수익과 직결된 판권이 아니었다. “Hey, it’s Taylor Swift”라고 말하는 목소리, 무대 위에서 기타를 든 모습.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녀의 시그니처 음색과 이미지였다. 그녀가 기타로 수놓은 각개의 카탈로그가 아닌 본질적인 그녀의 ‘모습’이 권리의 언어 안으로 들어온 셈이다.

자고로 저작권이란 인간의 창작물을 보호하는 울타리다. 하지만 생성형 AI의 시대가 도래하며 우리는 보호의 경계가 작품 바깥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렇기에 무수한 ‘-코어’ 트렌드에서 보듯, 현 시장은 완제품보단 스타일과 목소리, 얼굴과 분위기를 붙잡으려 한다. 한 사람의 말투, 억양, 몸짓, 타인이 기억하는 향기까지 식별 가능한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며, 그러한 요소를 갖춘 사람들을 하나의 사회적 계층으로 분류하는 상징성이 되었다.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 아니라 결과물을 가능하게 했던 흔적 자체가 거래와 보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목소리는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가장 비물질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복제 가능하고 소유 가능한 표지로 다루어진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인간을 하나의 산출 장치처럼 이해해 왔다. 근대 사회는 인간의 내면과 자유를 말해 왔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직업과 성과와 생산성으로 측정하는 일에 익숙했다. 누군가를 소개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대개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다. 자기소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앞선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보다 나는 어디에 쓸모 있는지가 먼저 검증된다. 노동의 가치는 어느새 존재의 가치와 뒤섞였다. 생산성은 자존감의 다른 이름이 됐다.

AI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계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코드를 짜고 상담을 하고 기획서를 쓰는 순간 인간은 일자리만을 걱정하지 않는다. 더 깊은 곳에서는 내가 나라고 믿어 온 근거가 흔들린다.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던 일, 오랜 시간 훈련해 온 자산, 직업적 정체성의 중심에 놓였던 기술이 순식간에 모방 가능해진다. 내가 쓰는 문장과 비슷한 문장을 기계가 쓸 수 있다면, 내가 하는 판단을 시스템이 대신할 수 있다면, 내가 축적한 취향과 지식이 데이터의 조합으로 재현될 수 있다면, 나를 나로 만들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렇듯 AI는 오래된 균열을 더 선명한 조명 아래로 옮겨 놓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이고, 작업은 세계에 남는 인공물을 만드는 일이며, 행위는 타인과 함께 공적 세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현대 사회는 이 구분을 거의 잃어버렸다. 생존을 위한 노동은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일은 삶의 의미를 대신했다.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은 인간의 존엄과 같은 자리에 놓였다. 우리는 일을 통해 세계에 참여한다고 믿었지만 동시에 일하지 못하는 순간 세계에서 밀려나는 법을 배웠다. AI는 이 불안을 증폭시켰다. 인간이 생산하는 존재라는 정의가 불안정해진 순간에야 우리는 뒤늦게 묻는다. 인간은 정말 생산성으로 설명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AI를 향한 비판적 관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의 마지막 영토를 사수하겠다는 태도가 아닐지 모른다. 기계가 못하는 일을 찾아 인간성의 증거로 삼는 방식은 늘 위태롭다. 생성형 AI가 처음 배포되었을 땐 인간과 기계를 구분짓는 것은 창의성이었고, LLM AI의 언어 능력이 고도화되며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공감 능력이었듯, 내일이 올 때까지 어떤 능력이 다시 대체되고 떠오를 지는 불투명하다. 기술은 그런 경계선을 계속 넘어왔다. 인간을 ‘기계가 아직 못하는 일’의 목록으로 정의하는 순간 인간의 자리는 기술의 성능표에 종속된다. 인간성은 방어선이 아니라 관계와 책임의 방식에 더 가깝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보다 왜 그 일을 하며, 그 행위가 누구에게 닿고, 그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느냐가 중요한 지표로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푸코가 말한 자기 기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만들어 온 존재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완성된 자아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언어, 제도, 습관, 교육, 관계, 취향, 직업, 연애, 정치적 선택을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일기와 고백과 독서와 수련은 모두 자기를 형성하는 장치였다. 디지털 시대의 프로필, 피드, 검색 기록, 플레이리스트, 저장한 이미지도 그 연장선에 있다. AI는 이 자기 형성의 장치를 외부화하고 가속화한다.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추천받고, 내가 쓸 법한 문장을 제안받고, 내가 될 수 있을 법한 이미지를 생성한다. 하지만 수익 구조가 내재화된 알고리즘은 자기 이해를 플랫폼의 제한적 예측에 가둘 수 있는 위험성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현 AI 시대에서 자기 주체성을 논할 때엔 “나는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생각한다”는 근대적 환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은 한 번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사고한 적이 없다. 우리는 언어를 빌려 생각하고, 타인의 문장을 통해 감정을 배우며, 사회가 제공한 범주 안에서 자신을 설명한다. 주체성은 외부의 영향이 전혀 없는 순수한 상태보단 수많은 영향 속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 결정하는 능력에 가깝다. AI 이후의 자율성은 도구를 쓰지 않는 결벽이 아니라 도구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는지 알아차리는 능력에 더욱 기반할 것이다. 자동완성이 제안하는 문장을 그대로 수용할 것인지, 그 문장이 내 생각을 평균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인지, 눈치채는가. 추천 시스템이 보여주는 세상을 전부라고 믿을 것인지, 그 바깥의 어색한 미지의 영역을 일부러 찾아 나설 것인지. 앞으로의 주체성은 고립보다 편집의 능력에 가까워질 것이다.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지연의 능력, 주어진 선택지 사이에서 고르는 것을 넘어 선택지 자체를 의심하는 능력 말이다.

정체성은 내면 깊은 곳에 완성된 형태로 숨어 있다가 밖으로 표현되는 대신, 반복되는 말과 몸짓을 통한 사회적 인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AI가 우리의 말투와 이미지와 취향을 모방할 때 불쾌함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성형 AI의 결과값을 볼 때 느끼는 불쾌함은 단순히 내 것을 훔쳤다는 것을 넘어서 내가 나라고 여겨 온 반복의 형식이 나 없이도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 불쾌함은 정체성이 얼마나 사회적이고 매개된 과정인지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다. ‘나다움’은 순수한 본질이라기보다 계속 수행되고 승인되고 기억되는 관계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기술 낙관론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AI는 이미 노동시장과 창작 생태계, 교육과 행정과 언론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비용을 줄이고 속도를 높인다는 명분 아래 인간의 숙련은 쉽게 비효율로 불리고, 경험의 축적은 구식으로 밀려나며, 플랫폼이 소유한 모델은 수많은 사람의 표현을 흡수한 뒤 그들에게 다시 경쟁자로 돌아온다. 테일러 스위프트처럼 강력한 법률팀과 자본과 팬덤을 가진 인물은 자신의 목소리를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장치를 실험할 수 있지만 이름 없는 배우, 성우,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번역가, 음악가는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기 어렵다. 기술이 민주화의 외피를 쓴다고 해서 이익까지 민주적으로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AI가 개인의 창작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 도구의 서버와 모델과 유통망과 수익 구조를 누가 소유하는지 묻지 않는다면 자아의 가치는 빠르게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AI를 신화적인 괴물처럼 그리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AI는 어느 날 지구를 침공한 초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다. 도리어 AI는 사회가 이미 향해 가던 방향을 가장 농축된 형태로 보여주는 신호에 가깝다. 더 빠른 처리, 더 낮은 비용, 더 정교한 예측, 더 개인화된 소비, 더 매끄러운 인터페이스, 더 적은 마찰.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세상을 추구해 왔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그런 세계가 우리를 지치게 한다고 말해 왔다. AI는 이 모순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인간의 창의성마저 생산성의 언어로 환산해온 사회, 관계마저 응답 속도와 정서적 효율로 평가해온 문화, 지식마저 검색 가능성과 요약 가능성으로 다루어온 환경이 AI라는 기술 안에서 압축되어 되돌아온다. AI를 본다는 것은 미래를 보는 일이면서 우리가 이미 살고 있던 현재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매클루언의 말처럼 매체는 인간의 감각 비율을 바꾸고 사회의 조직 방식을 바꾸며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조건을 바꾼다. AI 역시 단순한 도구보다 환경에 가깝다. 전기가 특정한 메시지를 갖고 있지 않아도 밤과 낮, 노동과 여가, 도시의 리듬을 바꾸었듯이 AI는 특정 답변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의 질문법과 기억법과 학습법을 바꾼다. 이 변화 앞에서 필요한 것은 기술 숭배도 인간만이 순수하다는 방어적 도덕주의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을 자동화해도 되는지, 무엇을 느리게 남겨두어야 하는지, 무엇을 인간이 직접 책임져야 하는지를 가르는 주체적인 사회적 판단력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일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왔다. 그것이 간혹 억압적인 체제의 부산물이었다고 해서 노동의 의미가 전부 허위였던 것은 아니다. 일은 사람에게 리듬을 주고,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며, 자기 능력이 타인에게 닿는 경험을 제공한다. 다만 우리는 그 의미를 시장이 인정하는 생산성 하나로 너무 좁게 가둬 왔다. AI가 반복적이고 기술적인 작업을 더 많이 대신하게 된다면 노동을 둘러싼 질문도 새로 써야 한다. 인간은 무엇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어떤 활동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함께 필요하다. 노동 시간이 줄어드는 사회가 곧 인간적인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는 시간이 소비와 고립과 불안으로만 채워진다면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공허다. 반대로 기술이 인간을 생산성의 강박에서 조금이라도 떼어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뒤늦게나마 일 바깥의 삶을 다시 배울 수도 있다.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 오늘날 기술 담론의 패착은 미래를 논하면서도 현재의 연장만을 반복한다는 데 있으며, 담론을 이끄는 정책 결정권자들이 그 미래에 오래 존재하지 않을 세대라는 점에 있다. 현재 우리에게 신기술의 방향성이라 포장해 제공되는 더 빠른 쇼핑, 더 정확한 추천, 더 효율적인 업무, 더 개인화된 콘텐츠 등은 건설적인 미래보단 현재의 욕망을 가속한 이미지에 가깝다. 혁신적인 기술이라 일컫는 AI의 등장에도 우리는 기존의 습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세상을 이해하려는 비논리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놀라운 생성 능력을 가진 기계를 손에 넣었지만 그 기계로 상상하는 세계는 종종 이미 존재하는 스타일과 장르와 팔리는 감정의 게으른 재조합에 머물고 있다. 무한한 생성의 시대에 상상력과 사고력이 빈곤해지는 역설. 우리는 AI와 함께 무엇을 상상할 용기를 갖고 있긴 할까 되돌아보아야 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라는 형상을 통해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화, 원본과 복제의 경계가 이미 뒤섞여 있음을 말했다. AI 시대의 인간도 순수한 원본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기계와 함께 기억하고, 플랫폼을 통해 관계 맺고, 알고리즘이 정렬한 세계 안에서 선택하며, 디지털 흔적으로 자신을 구성한다. 인간다움을 지키는 일은 기술과의 경계를 높이 쌓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 혼종성 안에서 더 나은 규칙과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해답일 수 있는 것이다. 기계를 쓰기 때문에 덜 인간적이라는 이분법보단 어떤 기계를, 누구의 이익을 위해, 어떤 책임 구조 안에서 쓰는지에 따라 인간다움의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포용해야 사고가 확장되는 것은 아닐까 감히 질문을 던져 본다.

그렇기 때문에 테일러 스위프트의 목소리를 둘러싼 법적 움직임이 흥미롭다. 목소리는 한때 사라지는 것이었다. 음파는 말하는 순간 공기 속으로 퍼지고, 듣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변형되는 휘발성의 미학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 목소리는 식별되고 저장되고 복제되고 보호된다. 노래가 녹음되며 상품이 되었듯 이제는 음색과 인격의 인상마저 권리의 언어 안으로 들어간다. 불안한 변화인 동시에 우리가 인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산물과 능력과 시장의 평가로 이해해 왔는지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AI가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기술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목소리를 곧 그 사람이라고 믿어왔을까에 대한 의논은 여전히 명쾌한 해답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고유성은 음색에 있는가, 얼굴에 있는가, 문체에 있는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통해 타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방식에 있는가.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책임이다. AI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지만 그 결과가 놓이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문장을 생성할 수 있지만 그 문장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을 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만들 수 있지만 그 이미지가 한 사람의 삶을 왜곡했을 때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결정에 관여할 수 있지만 그 결정 때문에 배제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 살아 숨 쉬며 그 후에 밀려드는 모든 파도를 끌어안아야 한다. 더 뛰어난 계산 능력이나 더 독창적인 산출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책임지고, 실패를 기억하고, 다시 말할 기회를 구하고, 자신이 만든 세계의 결과를 외면하지 않는 능력. 생산성의 언어로 측정할 수 없는 기준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규정짓는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작게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을 둘러싼 낡은 오해를 벗겨낼 수도 있다. 우리가 생산성을 존재적 이유와 혼동해 온 시간을 지나 노동의 성과와 인간의 가치를 다시 분리해낼 수 있다면 AI 시대는 인간의 퇴장이 아니라 인간 개념의 재작성으로 기록될 수 있다.

미래의 인간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존재’로 정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정의는 기술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불안해진다. 대신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맡길지 결정하는 존재, 무엇을 맡기지 않을지 고집하는 존재, 어떤 자동화 이후에도 책임의 자리를 비워 두지 않는 존재로 다시 설명되어야 한다. AI를 포함한 신기술은 우리를 대신해 많은 것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 가치가 있는지, 어떤 속도를 늦춰야 하는지, 어떤 목소리를 허락 없이 빌려서는 안 되는지, 어떤 삶을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서는 안 되는지는 여전히 인간의 질문으로 남는다.

기술은 종종 인간의 끝을 예고하는 얼굴로 등장한다. 조금 더 가까이 보면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오해해 왔는지 보여주는 자기투사의 일종이다. AI가 우리 사회의 방향을 가장 선명하게 대표하는 기술이라면 그 안에는 우리의 욕망과 피로, 야심과 두려움, 효율에 대한 중독과 의미에 대한 갈증이 함께 들어 있다. 이 시대의 과제는 AI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는 작은 영역을 방어하는 일이 아닌 인간을 너무 작게 정의해 온 언어를 버리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보다 크고, 생산성보다 복잡하며, 데이터보다 느리고, 결과물보다 오래 간다. 그 사실을 다시 배우는 데 AI만큼 이상하고 효과적인 교사는 없을지도 모른다.

-칼럼을 마무리하며-

지난 1년 간 이 지면을 통해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세 시간이 지나 식어가는 줄도 모르는 커피잔 앞에서, 휴대폰에 갇힌 음성과 사랑에 빠지는 영화 속 주인공을 보며 울음을 삼키던 새벽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복잡해지는 세상을 가까스로 쥐며 고민하던 세상의 페이지에서 나누던 대화를 많은 분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읽어주신 분들 덕분에, 저 역시 매 글을 쓸 때마다 조금씩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독자가 없는 글은 독백에 불과하다는 걸, 연재를 거듭하며 새삼 실감했습니다.

릴케는 말했습니다. “지금은 질문들 속에서 사십시오. 언젠가 먼 훗날,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으로 살아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칼럼을 쓰는 내내 답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부족하고 더딘 문장이었을지언정, 그 질문들을 함께 나눠주신 독자 여러분이 있었기에 이 연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더 오래 앉아 있고, 더 깊이 읽고, 지금보다 조금 더 정직한 문장으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려 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연재의 기회를 주시고 끝까지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이투데이 관계자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질문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간 보내주신 관심과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시 인사드리는 날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하늘은 매일 다른 색을 칠하며 내일을 준비합니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세상에 국면했을지라도 늘 상기할 수 있는 방향표가 있다면 그 시간을 채우는 모든 순간이 풍성한 그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끔은 식어가는 커피잔 앞에서 좋은 생각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저자 소개

반휘은은 글로벌 AI 거버넌스와 신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정책 컨설턴트이자 저술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디지털 인문학, 미디어철학, AI윤리를 전공하며 석사과정을 마친 후, 뉴욕 유엔본부의 (전)기술특사실 (현)디지털과 신기술사무국(전 Office of the Secretary-General’s Envoy on Technology, 현 Office for Digital and Emerging Technologies)에서 AI 정책 연구와 분석을 주도했다. 안보, 에너지, 노동, 건강, 법의 지배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거버넌스를 위한 전략적 프레임워크를 개발했으며 20회 이상의 고위급 자문 회의를 주관하며 AI 정책을 구체화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주요 산업 리더들과 협력하여 AI 거버넌스의 글로벌 표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반휘은은, 디지털 윤리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학계와 산업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현재는 AI 거버넌스를 주제로 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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