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후손들 위해 빨리 지어야지⋯ 정치권 이전론에 속도 못낸다" [정치에 갇힌 용인 반도체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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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주택 지연에 불안한 주민들
강제수용 불가피 인식도 공존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창리 도로에 주민들이 내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주민들은 LH 보상과 관련해 임시 주택 제공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수진 기자 abc123@)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창리저수지 인근 도로. 보행자 한 명 없이 적막한 길 위로 바람이 스치자 커다란 현수막들이 요란하게 펄럭인다. ‘600년 잠든 선친 무덤 지키자’, ‘화곡마을 다 죽이는 국가산단 결사반대’, ‘내가족 목숨걸고 지키자’.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노인들이 대부분인 이 마을에서 ‘투쟁’과 ‘단결’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화곡노인정 문을 열자마자 붉은색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LH 자폭하라’. 바로 옆 창3리 화곡주민 비상대책 사무소에는 ‘국가산단 지정철회’, ‘마을 생존권 수호’라는 문구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조용했던 농촌 마을 곳곳에 남겨진 흔적들은 이곳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주민들의 불만은 보상 절차, 그중에서도 임시 거주 대책에 집중돼 있다. 한 주민은 “LH 지장물 보상 계약서에 따르면 9월 30일까지 집을 비워야 하는데 어르신들이 그걸 보고 많이 불안해한다”면서 “임시 거주 주택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도 좀처럼 진행이 안 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최근 불거진 정치권 논쟁도 문제로 지목했다. “정치인들이 반도체 클러스터 지방 이전 얘기를 하면서 선거에 이용하는 것 같다”며 “작년 12월 이후로는 사업 속도를 일부러 조절하는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화곡노인정에 ‘LH 자폭하라’는 문구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주민들은 보상 과정에서 임시 주거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이수진 기자 abc123@)

실제로 주민들은 사업 초기부터 임시 거주 주택 제공을 요구해 왔고 LH도 이에 노력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인근 주택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압류 해제 등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해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상황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절차가 멈춘 것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까다로운 부분이 많다”며 “주민들이 체감하는 속도는 더디게 느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국가산단 조성 자체를 막을 수 없다는 데에는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해당 지역의 한 공인중개사는 “논과 밭은 보상 합의가 상당 부분 이뤄졌지만 임야는 종중 땅이 많고 보상가도 낮아 반대가 많은 편”이라며 “그래도 결국 정부 사업이라 강제수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고 보상률이 50%를 넘기면 주민들은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읍의 한 밭에서 만난 1938년생의 한 주민은 3평 남짓한 땅에 심긴 땅콩을 매만지며 담담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땅콩 팔아봐야 푼돈이지만, 그마저도 세금을 내야 나라가 살고 자식들도 먹고사는 것 아니겠느냐”며, “나도 산에 땅이 있지만, 하루빨리 보상 절차가 끝나 공장이 들어서야 우리 딸도 손주들도 다 같이 잘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을 내어주는 아쉬움보다 자식 세대의 번영을 먼저 생각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선배 세대의 묵직한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에서 만난 한 주민이 산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보상이 서둘러 이뤄지고 국가산단이 차질 없이 들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진 기자 abc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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