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원대 GAST공학대학원장
‘성공할 연구’에 쏠려선 한계 눈앞
실패 인정하는 R&D문화 자리잡길

지난달 세계적 미래전략 기관 FTSG(Future Today Strategy Group)의 에이미 웹 대표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 2026’에서 이례적인 선언을 하였다. 18년간 발간해 온 대표작 ‘테크 트렌드 보고서’의 폐기를 장례식 퍼포먼스로 알리고,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2026 융합 전망(Convergence Outlook 2026)’ 보고서를 공개한 것이다. “변화는 앞으로만이 아니라 옆으로도 퍼져나간다. 개별 트렌드를 이해하는 것만으론 부족한 시대”라는 것이 전환의 이유였다.
2026 융합 전망이 주는 핵심은 간략하다.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 컴퓨팅이 이제 따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AI가 신약 후보 물질을 스스로 찾아내고, 로봇이 사람의 명령 없이도 주변 환경을 파악해 움직이는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 기술이 각각 진화하던 시대는 끝났고, 서로 결합해 전혀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융합이 한번 자리 잡으면 되돌리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에이미 웹은 “어제의 가장 큰 강점이 내일의 가장 위험한 부채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메시지를 국방으로 옮기면, 경쟁은 이제 ‘무기 하나의 성능’이 아니라 다영역의 변화가 빚어내는 ‘전장 시스템’에서 벌어진다. 한국의 국방 연구개발(R&D)은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 1970년대 기본 병기의 국산화에서 출발해 K-2 전차, K-9 자주포, KF-21 보라매, 천궁-II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만에 세계가 주목하는 무기체계를 만들어냈고, 국방과학기술 수준은 미국 대비 82%로 세계 8위에 올랐으며, 최근 수년간 방산 수출 계약액은 사상 최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K-방산의 ‘축적의 힘’이 증명된 것이다.
그러나 이 추격형 R&D의 성공 방식이 융합의 시대에도 유효할 것인가. 최근 미국·이란 전쟁에서는 AI 기반 표적 선정, 자율 드론 군집, 사이버와 물리적 타격의 동시 수행이 하나의 작전으로 작동하였다. 동시에 이란의 저가 드론 군집이 고가의 방공 체계를 소모시키는 비대칭 양상도 목격되었다. 전장의 승패가 기술 간 융합의 깊이와 비용 대 효과의 새로운 방정식에서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가 무기체계가 이러한 융합적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R&D의 ‘양’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2026년 정부 R&D 예산은 35조 3000억원, 방위력개선비는 20조 1744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이다. 예산은 커졌는데, 질문이 작으면 성과는 분절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국민보고회에서 “R&D 성공률이 90%를 넘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황당한 얘기인가”라고 직접 언급하였다. 올해 1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토론회에서도 기초과학연구원 염한웅 단장이 “성공률 99%는 착시이며, 실패한 결과가 학습 자산이 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였다. 실패가 곧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평가 구조가 연구자들을 ‘성공하는 연구’에만 매몰시킨 결과다.
반면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역대 국장의 공식 발언에 따르면 프로젝트의 85~90%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그 높은 실패율 속에서 인터넷, 위성항법장치(GPS), 스텔스 기술이 탄생하였다. 국방 R&D도 이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경직된 작전요구성능(ROC)과 성공 중심의 성과 지표는, 에이미 웹이 폐기한 ‘개별 트렌드 나열식 분석 틀’과 다르지 않다.
서울대(SNU)가 올해 3월 출범시킨 ‘SNU 그랜드퀘스트 이니셔티브’는 주목할 만하다.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출범식에서 “단순한 연구 지원 프로그램이 아닌 서울대 연구 패러다임 전환의 선언”이라고 하였다. 핵심은 ‘성공할 연구’가 아니라 ‘도전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질문 자체를 핵심 성과로 평가하며, 가설이 기각되더라도 지식 자산으로 인정한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도전적 질문을 던지고 시행착오를 버티면서 스케일업 해나가는 것”이 혁신의 본질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교수는 현재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과학과 기술의 미래’ 연구클러스터장으로서 이 사업을 이끌고 있다.
국방 R&D에도 이런 전환이 절실하다. 첫째, ‘무기 개발’이 아닌 전장 문제를 시스템 수준에서 정의하는 ‘질문 설계’ 역량이 필요하다. 둘째, 중간 실패를 비용이 아니라 학습 데이터로 인정하는 평가 체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셋째, 실패의 과정을 공유해 다음 도전의 밑거름으로 삼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성과를 감추는 문화는 단기 체면은 지키지만, 장기 전력을 갉아먹는다.
FTSG가 자신의 대표 보고서를 스스로 폐기했듯이, K-방산도 추격형 R&D의 성공 공식에 작별을 고하고 융합 시대의 도전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작전요구성능이라는 경직된 분석 틀을 넘어, 대학과 산업, 군이 함께 참여하는 ‘국방 그랜드퀘스트’형 도전 프로그램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실패를 견디는 R&D 구조가 있어야, 융합이 만드는 미래 전장에서도 K-방산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