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휘은의 AI 이야기] AI 강국이라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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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빼놓은 AI 전략의 결말

▲반휘은 칼럼니스트/ AI컨설턴트. (출처=본인 제공)
강제의 잔상은 때로 친절한 얼굴로 온다.

2026년 3월 21일, 서울의 심장부가 멈췄다.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1.2킬로미터 구간의 통제선, 31개 게이트와 공항식 보안검색대 및 금속탐지기, 서울의 중심을 지나는 세 개의 지하철 역 무정차 통과, 경찰 6700명을 포함한 1만5500명의 공공 인력 동원. 콘서트와 무관한 시민들이 몸수색을 받았고, 개인 소지품을 검열당했으며 자신이 사는 도시의 중심부를 통과할 권리를 빼앗겼다. 2년 전 12월의 계엄 당시에도 없었던 일이 K팝 콘서트를 명분으로 벌어졌다. 총구가 아니라 바리케이드와 금속탐지기로, 군복이 아니라 형광 조끼로.

콘서트에 관심이 없는 시민 입장에서 보자면 이 모든 게 하이브라는 특정 사기업의 한 시간짜리 콘서트 진행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불편이었다. 이 기업의 광화문광장 대여료는 3천만원, 경복궁·숭례문 촬영 허가 비용을 합산해도 9천만원에 불과했다. 해당 공연을 돕기 위해 세금 수십억이 하루 만에 소비된 것에 비하면, 대한민국의 상징적 공공 공간이 한 기업의 프로모션 무대로 전환되는 데 드는 비용은 놀라울 만큼 저렴했다.

물론 BTS가 그동안 국가 브랜드 제고와 K팝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데 기여한 공로와 성과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번 공연만 해도 대한민국을 인류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범국민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의 불편과 희생은 마땅한 것일 수도 있다. 덕분에 우려했던 안전사고 역시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서울시 실시간 도시데이터가 기록한 인원은 4만 2천명 선이었다. 예상치를 훨씬 밑돌았다. 이마저도 실제 관람객, 동선이 겹친 시민, 주말에 동원된 경찰과 공무원을 제외하면 그 인원은 훨씬 줄어든다. 넷플릭스 실시간 중계를 간과한 수요 예측 실패, 과잉 통제가 불러온 시민들의 기피, 그리고 애초에 부풀려진 기대치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같은 시간 홍대와 잠실 일대에 11만 명이 운집한 것을 감안하면, 서울 시민들은 광화문을 피해 다른 곳으로 흩어진 셈이다. 인근 편의점들은 26만 명분의 재고를 떠안았다.

공연 하루 전, 대전 대덕구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14명이 사망했다. 무허가 복층에서 잠들었던 노동자들이 유독가스에 질식했고, 금속 나트륨의 폭발성 때문에 초기 진화조차 여의치 않았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화재 현장을 두 차례 방문한 뒤, 같은 날 세종문화회관 통합현장본부로 이동해 BTS 공연 안전관리회의에 참석해 이를 “국가와 공동체가 지원하는 행사”라고 강조했다. 평범한 근로자 14명의 죽음과 아이돌 그룹의 복귀 무대가 같은 날에 하나의 관료적 문장 속에서 병렬 처리되는 풍경. 공적 애도의 위계는 그렇게 뒤섞였다. 어색하고도 낯설은 장면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강변할 것이다. BTS 공연이 대전 화재와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지만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자녀였을 14명이 죽은 다음 날 “다 불태워”를 외치는 무대를 진행할 수 있는 감수성, 그것을 국가적 행사로 격상시키는 정부 최고위층 인사의 비정함,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무감각이 무섭다.

참사와 축제 사이에 최소한의 거리두기조차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기술이 초래할 재난 앞에서 똑같이 무방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번 공연에 대한 논란이 호사가들의 에피소드 정도의 소모성이라면 굳이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규모와 숫자로 밀어붙이며, 성공의 수사로 덮어씌우는 동역학. 이 동역학이 현 정부의 인공지능 정책에서도 정확히 같은 구조로 반복되면 안 되기에 걱정이 앞선다.

정부는 2026년 예산안에서 AI 관련 총 10조 1천억 원을 편성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만 5조 1천억 원이다. 향후 5년간 민관 합산 100조 원을 투입해 GPU 5만 개를 확보하고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겠다는 청사진도 제시됐다. ‘AI 3대 강국’, ‘잠재성장률 3%’, ‘국력 세계 5강’이라는 비전 아래 30대 선도 프로젝트가 나열되어 있고, AI 인재 1만 1천 명 양성이라는 숫자가 첨부되어 있다. 대통령실에 AI미래기획수석까지 신설됐다.

이전 정권과는 확실히 다른 대단히 적극적인 AI 정책이다. 하지만 이 모든 숫자와 조직도 뒤에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 있다. 이 기술이 작동할 사회의 토양은 준비되어 있는가?

한국 학생들의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능력이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PISA 데이터에 따르면 이 역량을 갖춘 15세 학생 비율이 25퍼센트에 불과하다. 자기주도학습능력지수도 OECD 평균을 밑돈다. 2025년 IMD 세계 디지털 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의 인재 부문은 49위로, 전년 대비 30계단이나 추락했다. 기초 학력 수준은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디지털 환경에서 정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하는 능력은 바닥이라는 뜻이다. 국내 기업의 AI 도입률은 2023년 기준 6.4퍼센트, 제조업은 4퍼센트에 그쳤다.

정부의 AI 정책이 하드웨어에 집중돼 있다는 점도 아쉽다. GPU 숫자, 데이터센터 면적, R&D 예산 규모들도 중요하지만, 현재와 같은 AI 정책은 도로를 깔면서 운전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교통법규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운전면허 체계도, 사고 발생 시의 책임 구조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AI 시대에 필요한 문해력은 코딩 교육이나 소프트웨어 활용 능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가 필요한 것은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능력이고, AI가 생성한 텍스트와 이미지 속에 내재된 편향을 식별하는 감각이며, 자동화된 의사결정 시스템이 개인의 권리와 공공의 이익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시민적 역량이다. 유네스코가 디지털 시민성의 핵심 축으로 디지털 리터러시, 디지털 안전, 디지털 참여, 디지털 감성 지능, 디지털 창의력을 제시한 것도 이 때문이고, OECD가 기존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넘어 데이터 리터러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한국 교육 정책의 현실은 어떠한가. 2022년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AI 교육’과 ‘디지털 소양 교육’에 밀려났다. 국어과에서 ‘언어와 매체’ 영역이 삭제됐고, 이를 두고 전국국어교사모임은 매체 교육 발전의 퇴행이라고 비판한다. 디지털 인재 양성, AI for All, 디지털교과서, 교원 디지털 역량 강화 등 다양한 사업이 병렬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만 학교 현장에서 이를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통합하기는 어렵다는 지적 역시 이어진다. 코딩과 프로그래밍 중심의 기술 교육은 확산됐지만, AI 윤리, 데이터 리터러시, 생성형 AI 결과물의 검증 능력 교육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정책의 파편화 속에서 이미 실질적인 장악력을 잃은 교사의 업무 부담만 커지고 있다.

핀란드는 상급 중등 교육 자료의 80퍼센트 이상을 디지털로 제공하며 디지털 교육을 선도했지만, 학생들의 학업 성취 저하를 확인한 뒤 종이 교과서로 회귀했다. 미국은 2025년 행정명령을 통해 AI 리터러시 확대와 교사 재교육, 안전 가이드라인을 연방 차원의 전략으로 격상시켰다. EU는 DigComp 프레임워크를 통해 AI 역량을 이해, 활용, 검증, 윤리·안전의 네 축으로 구조화했다. 이들 국가가 공유하는 인식은 분명하다. AI 정책은 곧 시민 역량의 문제이며, 하드웨어 투자만으로는 절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접근법은 거리가 한참 있는 듯하다. 10조 원의 예산, 100조 원의 투자 약속, GPU 숫자, 데이터센터 개수는 모두 수량화할 수 있고, 발표 자리에서 슬라이드 한 장에 담기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AI 기술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사회적 기반, 즉 AI가 민주주의와 공공정책과 미디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할 수 있는 집단적 역량은 이 숫자들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는 듯하다. ‘AI 3대 강국’이라는 목표를 강조하면서 정작 이 기술과 함께 살아가야 할 시민들의 준비 상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정부는 AI를 도입하고 있지만, AI를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고민해 보아야 할 깊은 문제가 있다. 이재명 정부의 AI 담론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기술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의 분위기다. AI는 의문 없이 좋은 것이고, 더 많이 도입하면 더 좋으며, 뒤처지면 망한다는 식의 수사가 정책과 언론을 뒤덮고 있다. 무엇을 위한 속도인지, 누구를 위한 전환인지에 대한 물음은 생략된 채, 탑승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공포만이 정책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성찰의 여지가 없는 속도는 방향을 잃기 마련이다.

이는 기술 정책이 아니라 기술 숭배다. 그리고 그 숭배의 이면에는 익숙한 동기가 있다. 즉각적인 수익, 가시적인 성과, 발표와 보도자료로 치환 가능한 숫자. AI를 도입한 기업의 부가가치가 7.6퍼센트 증가했다는 통계가 정책의 근거와 성과로 제시될 때, 그것은 기술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바라보는 시각을 정부가 공인하는 것이다. AI의 사회적 영향, 노동시장의 재편, 정보 비대칭의 심화, 알고리즘에 의한 차별과 감시의 가능성 같은 질문들은 이 성장 중심 담론에서 배제된다.

사회 전체가 AI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면서 표면에 보이는 즉각적 보상만을 쫓는 이 같은 분위기는 역설적으로 AI 시대에 가장 취약한 자세다. 기술 변화의 방향과 의미를 해석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며, 필요하다면 그 흐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시민사회의 주체성 없이는, 아무리 많은 GPU를 쌓아올려도 결국 다른 나라가 설계한 시스템의 수동적 소비자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나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는 사회. AI 강국을 외치면서 실질적으로는 타국의 기술 종속을 심화시키는 아이러니가 우리가 접하고 있는 현실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한국은 지금 AI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AI에 ‘당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번 BTS의 광화문 공연 논란이 정확히 여기에 맞닿아 있다. 팬덤의 실질적 소비 구조를, 넷플릭스 중계가 현장 관람 수요에 미칠 영향을, 도심 통제가 시민의 일상에 가하는 부담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면 이 기획은 처음부터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AI 정책도 같은 궤적을 밟고 있다고 걱정하면 지나친 기우일까? 정책의 성과는 일반적으로 숫자로 제시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숫자에 함몰될 때 가져올 사회적 기반의 취약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쉽다. 더 어려운 것은 비판의 핵심을 정확히 짚는 일이다. 투자는 필요하고, 인프라 구축도 중요하며, 인재 양성도 시급하다. 그럼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정책의 토대가 되어야 할, 즉 시민 사회가 AI 기술과 함께 살아가야 할 방식과 관련한 근본적인 성찰과 준비가 구조적으로 부재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GPU를 사들이는 정부는 있지만, AI가 생성한 허위 정보를 분별하는 교육 과정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AI 데이터센터를 짓는 로드맵은 있지만, 알고리즘의 편향이 고용과 대출과 형사 사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부족하다. AI를 국가 전략의 중심에 놓으면서, 그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들은 여전히 관객으로 밀려나 있다.

26만 명이 올 것이라는 예상과 실제 참석 인원 4만 명이라는 간극의 의미를 이제라도 읽어야 한다. 단순한 수요 예측의 실패가 아니라, 대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리더십의 불완전성은 더 큰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AI 시대를 준비하는 방식은 예산서에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기술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사회의 바닥부터 다시 설계하는 것이어야 한다. 숫자를 넘어서 문해력으로 측정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AI 강국이다.

아무리 큰 무대를 세워도 관객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는 소실된다. 현 정부는 국민을 안고 갈 것인가, 빈 무대의 조명만 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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