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시대착오적 관치가 부른 세금청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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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부 박꽃 기자 (사회경제부 박꽃 기자)
어느 월요일 저녁 8시, 법무부가 출입기자단을 급히 소환했다. 미국 사모펀드 앨리엇이 우리 정부에 제기한 투자자-국가 분쟁(ISDS)과 관련해 중요 뉴스가 있다고 했다. 2023년 우리 정부에 불리한 판정을 내렸던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승소’했단 소식이었다. 다음날 오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정부 배상금이 0원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왔다. 부처 기자회견으로서는 이례적일 만큼 논조도 태도도 흥분돼 있었는데, ‘국고를 노리는 해외 탐욕자본에 정부가 제동을 걸어 크게 이겼다’는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전문가 의견은 좀 달랐다. 국제분쟁 사건을 다수 맡아 사정을 잘 아는 한 변호사에게 물으니 “법무부의 이런 발표는 잘못된 것”이란 반응이 나왔다. 중재판정을 취소해 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해서 본안까지 이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정부기관이 아니다’라는 논리가 일부 받아들여져 사건이 PCA로 환송됐지만, 정부의 개입 여부라는 핵심 판단이 뒤집힌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사건 구조는 우리 정부가 약 860억원을 배상하게 된 ‘메이슨 사건’과 유사하다는 지적이다.

지금껏 해외 투자자들에게 수백, 수천억원 대의 국제분쟁 소송 빌미를 제공한 건 ‘정부의 부정한 자본시장 개입’이었다.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을 확보할 길이 없던 해외 자본들은 우리 법정에서 전개된 형사재판에서 명확한 제소 근거를 찾았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사건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로 2017년 기소돼 2022년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엘리엇은 이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정보를 국제분쟁 소송에서 적극 활용했다고 한다. 한 국제분쟁 연구자는 “위상 있는 국가로서는 좀 창피한 일이 빌미가 된 것”이라고 했다.

시대착오적인 관치가 유발한 대규모 배상금액은 모두 세금으로 충당된다. 희박한 확률을 뚫고 패소를 면해 최종적으로 소송 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제분쟁 사건에서 명성을 떨친 해외 유력 변호사들을 선임하는 데 드는 몸값 등 준비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치러야 할 행정비용은 적지 않다. 엘리엇 사건에서도 우리 정부는 영국 칙선(KC, King‘s Counsel) 변호사를 선임했다. 잇따르는 ISDS 사건 뒷수습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세금을 줄일 획기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건 결국 한가지일 것이다. 자본시장을 대하는 정부의 선진적인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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