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국 금융시장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서학개미’로 불리는 개인 투자자들의 거센 해외 투자 열풍이다. 환율 변동성이 커지고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이 깊어지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우리 자본의 해외 유출은 그 어느 때보다 가속화되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말 기자간담회에서 내국인의 해외 투자가 과거보다 약 세 배나 급증했음을 직접 언급하며 우려를 표한 것은 현 상황의 엄중함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통계가 가리키는 지표는 경이로운 수준이다. 미국 재무부의 국제자본흐름(TIC)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투자자의 미국 주식 순매수 규모는 약 735억6000만달러에 달했다. 이는 전 세계 주요국 중 노르웨이와 싱가포르라는 거대 국부펀드를 보유한 국가들에 이어 사실상 세계 3위에 해당한다. 인구 규모나 경제 체급이 비슷한 대만이 102억달러 수준에 그쳤고, 오히려 순매도를 기록한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 개인 투자자들의 행보는 매우 이례적이며 공격적이다.
왜 기축통화국도 아닌 한국의 개인들이 이토록 미국 주식에 열광하는가. 대개는 국내 증시의 고질적인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 미흡한 기업 지배구조, 북핵 등 지정학적 리스크를 원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요인만으로는 2019년 약 11조원에 불과했던 해외 투자 규모가 불과 5~6년 만에 1000억달러(약 130조원 이상)를 돌파하며 10배 가까이 폭발한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 현상의 이면에는 국내 증권사들이 사활을 걸고 구축한 ‘세계 유일의 투자 인프라’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증권 서비스는 이제 투자자가 국내 주식과 미국 주식의 경계를 느끼지 못하게 할 정도로 고도화됐다. 대표적인 것이 ‘통합증거금(원화주문)’ 서비스다. 투자자는 별도의 환전 절차 없이 원화만으로 미국 주식을 즉시 주문할 수 있다. 증권사가 환전 리스크를 감수하며 결제 시점에 사후 정산을 처리해 주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한국 투자자들은 시차를 극복하고 낮에도 미국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주간 거래’ 시스템을 누린다. 국내 주식을 매도한 대금을 즉시 해외 주식 매수에 활용할 수 있는 D+0 주문 체계와 복잡한 양도소득세 신고를 대행해 주는 서비스까지 더해지면, 미국 시장은 문자 그대로 ‘안방’이 된다. 환전, 결제 주기, 세금이라는 해외 투자의 3대 장벽을 증권사가 기술과 자본으로 허물어버린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서비스가 정작 미국 본토나 다른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비롯한 주요국 당국은 자금세탁방지(AML)와 고객확인(KYC)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며, 계좌에 실물 자산이 없는 상태에서 주문이 나가는 구조를 엄격히 제한한다. 반면 한국은 ‘고객 편의’라는 명목하에 증권사가 리스크를 떠안는 독특한 구조를 안착시켰다.
결국, 이러한 과도한 편의성은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증권사들이 닦아놓은 ‘해외 투자 고속도로’는 수익률이 높은 곳으로 자본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통로가 됐다. 개인 투자 차원에서의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달러화)’이 가속화되면서 국내 자본 시장의 공동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서학개미 열풍은 단순히 투자자의 변심이 만든 결과가 아니다. 국내 금융사들이 수익 모델 다변화를 위해 구축한 최첨단 서비스 인프라가 결과적으로 국가 자본의 이탈을 부추기는 촉매제가 된 셈이다. 기축통화국도 아닌 나라에서 미국 증권사도 제공하지 않는 수준의 편의성을 경쟁적으로 제공하는 이 기이한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제는 편리함 속에 감춰진 자본 유출의 속도와 시스템 리스크에 대해 진지한 정책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